좋아하는 詩

저녁 산책 - 배창환

효림♡ 2013. 1. 2. 15:37

* 저녁 산책 - 배창환

 

  아들아, 너와 나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 언젠가 신점(神占)으로 소문난 월항 할매 찾아 내 손바닥을 펼쳤을 때, 

너는 그 여자의 확언에 의해 내게 운명적으로 점지될 생명이었다. 나는 너를 여기 이 앵무동 마을까지 데리고 왔다.

이 마을은 내가 꿈에도 날아와 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첫눈에 이 집은 내 집이었고 너의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적송 기울어진 언덕 구름 속을 달리고 있는 이 저녁을 세상 마지막날까지 갖고 가리라. 

너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걷고 있다. 새로 지은 뒷집 건너 뒷집 똥개 두 놈이 내가 발을 뗄 때마다 정확하게 두 번씩

짖어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천천히, 그 집 담장 아래서 쟁반을 돌리고 있는 접시꽃 곁을 지나간다. 

그 곁에는 털이 송송한 강아지풀과 시들어버린 쓴 냉이들이 붉은 노을에 얼굴을 적시고 있다.


  이 골목을 따라 산그늘에 이르면, 새로 이사 온 네 반 소라네 집 인정 많은 가족들과 함께 사는 산닭이 다 된  토종닭과,
그들의 손때 묻은 고구마 감자 파 고추 참깨 농장이 있다. 페달에 힘을 주는 네 발이 규칙적으로, 때로 불규칙적으로 달리

내 발과 같은 역학으로 굴러간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를 듯이 너무나 즐거워하는 너는, 구르는 바퀴 아래 툭툭
튕겨나가는 돌멩이 한 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굴러 가는지 관심이 없지만, 지금 너를 둘러싸고, 너를 이루어가고 있는

느 한순간도 그리움 아닌 것 없는 날이 곧 오리라.


  꽃밭에서는 네가 동무들과 노는 마당으로 나오고 싶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다알리아나, 이제 막 담장에 기어오를  채비를
하고 있는 장미덩굴이나, 허리가 너무 커져서 언제나 걱정인 황국이나, 초파일 절간  빨랫줄에 오롱조롱 걸어논 연등 같은
옥잠화, 홍매, 백매, 나리, 원추리, 맨드라미, 작약, 유도화, 올해도 피어날 과꽃, 돌담 그늘 아래 숨어든 꽈리, 가야산  깊

골에 살다 날 따라 이사 온 까치수염, 둥굴레, 머구, 취나물, 참취나물, 봄에 먹는 달랭이, 아니면 부처님 머리 같은 불두화,

그 아래 작은 보리수, 라일락, 목련, 어서 가을 세상 만들고 싶은 감나무까지도, 인구밀도 너무 높다고 마당 아래로 내려선

채송화를 다들 부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내가 일부러 모른 체 솎아나 주고 가지나  슬슬 쳐주는 이유에 대해서도,

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너에게 웃음이되고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이 되리란 것을 나는 안다.


  또 있다. 이침저녁으로 배추, 상추, 무, 파, 토란, 가지, 들깨, 토마토, 오이, 도라지, 호박, 부추, 고추 밭에 물 주고

띁어 닭모이 주는 이 크고 작은 일들이 너를 쑥쑥 자라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그렇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순전히 흙 때문이었다. 그 옛날 그가 내게 그랬듯이, 훗날 나없는  세상에서도 그는 일년 사시사철  봄바람 겨울 눈비의 춤
노래 속삭임 안으로 너를  불러내리라.


  아직 자전거는 비탈을 오르기 위해 갈짓자로 비틀비틀 취한듯 굴러 가고 있다. 우리집 마루에서 보면  저녁마다 네모진

틀에 걸려 멀리 소나무숲을 넘지 못하고  쩔쩔매던 그 구름이, 잠시 후 저 가야산 상봉에서 가천 금수 골짜기를 지나 벽진

전 벌판으로 내려서는 걸 보게 되겠지만, 저 구름과 산과 벌판 또한 네가 세상에 나가 쓴맛을 알고 난 뒤, 어느 날 문득

외로움과 그리움이 너를 마구 흔들어 사무칠 때, 네게 와선 다시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마침내 자전거는 언덕바지에 오르고 있다. 한줄기 바람이 헉헉거리는 너의 입으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오고, 나는 그 바람을

내 입으로 빨아들인다. 또 하루 해가 붉은 잠자리떼를 온 산천에서 거두어 네 공부방 황토벽 그림달력 속으로 들어가고, 

잠깐 잊고 있던 새들이 저 먼 지평 너머에서 깃을 치며 숲으로 돌아오고 있다.


곧  밤이슬이 내릴 것이다. 돌아가자 아들아, 오늘 저녁 산책이 여기서 끝나고 있다. *

 

* 배창환시집[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