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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시편(蓮花詩篇) - 오장환

효림♡ 2013. 2. 20. 17:34

* 연화시편(蓮花詩篇) - 오장환

 

곡식이 익는다. 풀섶에 벌레가 운다. 이런 때 연잎은 지는 것이다.

차고 쓸쓸한 꽃잎 하나 줄기에 붙이지 않고 연잎은 지는 것이다.

일년 가야 쇠통 맑은 적 없는 시꺼먼 시궁창 속에 거북은 보는 게었다.

봄철 갈라지는 얼음장, 여름 찾아 점벙대던 개구리 새끼. 모든 것이 침전하였다. 모든 게 오직 까라앉을 뿐이었었다.

연잎이 시들면, 연잎이 시들면, 심심한 수면 위에 또 한 해의 향기는 스미어들고

 

물속에 차차로 가라앉는 오리털,

이 속에 손님이 오는 것이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기맥도 없이 밤이슬은 내리어 서리가 된다.

소 몰고 돌아가는 저녁길, 저녁길의 논두렁 위에 푸뜩푸뜩 풍장치며 흩어지는 농사꾼.

오곡이 익은 게었다. 곡식이 익은 게었다.

웅덩이에는 낙엽이 한 겹 물 위에 쌓이더니 밤마다 풀섶에는 가을벌레가 울고, 낙엽이 다시 모조리 가라앉는 날,

죄그만 어족들은 보드라운 진흙 속에 연뿌리 울타리 하여 길고 긴 겨울잠으로 빠지는 것이었었다.

한때는 그 넓은 이파리에 함촉 이슬을 받들었을 연잎조차 잠자는 미꾸리와 거머리의 등을 덮는 것이나,

두 눈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인 거북이의 등 위엔, 거북이의 하늘 위엔 살얼음이 가고  그것이 차차로 두꺼워질 뿐.

까만 머리 따 늘이는 밤하늘에도 총총하던 별 한 송이, 별 한 송이 비최지 않고, 희부연 얼음장에는 붉은 물 든 감잎이 끼어있을 뿐.   한겨울은 다시 얼어붙은 웅덩이에 눈싸리를 쌓아 얹으나 어둠 속에 가라앉은 거북이는, 목을 늘여, 구정물 마시며,

반년 동안 밤이 이읏는 아라사의 옥창(獄窓)과 같이, 맛없는 울음에 오! 맛없는 울음에 보드라운 회한의 진흙구덩이 깊이 헤치며

뜯어먹는 미꾸리와 거머리.

두꺼운 얼음장 밖으로 연이어 연이어 깜깜한 어둠이 흐른다 해도, 구름 속에 상현달이 오른다 해도

거북이의 이고 있는 하늘엔 희부연 얼음장이 깔려 있을 뿐, 한 사리 싸락눈이 쌓여 있을 . *

 

* 도종환지음[도종환의 오장환 詩 깊이 읽기]-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