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용가(處容歌) - 고려 가요
신라 성대 밝고 거룩한 시대
천하 태평 나후의 덕
처용 아비여.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삼재와 팔난이 단번에 없어지도다.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머리 가득 꽃을 꽂아 기우신 머리에
아아, 목숨 길고 멀어 넓으신 이마에
산의 기상 비슷 무성하신 눈썹에
애인 상견하시어 온전하신 눈에
바람이 찬 뜰에 들어 우그러지신 귀에
복숭아꽃같이 붉은 모양에
오향 맡으시어 우묵하신 코에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내미신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여진 어깨에
길경에 겨워서 늘어진 소매에
슬기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복과 지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태평을 함께 즐겨 기나긴 다리에
계면조 맞추어 춤추며 돌아 넓은 발에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지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의 가면을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많고 많은 사람이여.
모든 나라가 모이어 만들어 세웠으니
아아, 처용 아비를 많고 많은 사람들이여.
버찌야, 오얏아, 녹리야.
빨리 나와 나의 신코를 매어라.
아니 매면 나릴 것이다. 긎은 말이
신라 서울 밝은 달밤에 새도록 놀다가
돌아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누구의 것인가?
이런 때에 처용 아비가 보시면
열병신 따위야 횟갓이로다.
천금을 줄까? 처용 아비여.
칠보를 줄까? 처용 아비여.
천금도 칠보도 다 말고
열병신을 나에게 잡아 주소서.
산이나 들이나 천 리 먼 곳으로
처용 아비를 피해 가고 싶다.
아아, 열병 대신의 소망이로다. *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李肸隱吾下於叱古
二肸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 긔 래/밤드리 노니다가/드러 자리 보곤/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둘흔 뉘해언고/본 내해다마/아 엇디릿고." - 양주동(梁柱東)역
노래의 풀이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 처용단장(處容斷章) 1-2 - 김춘수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
* 처용 아내의 노래 - 문정희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허긴 천 년 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늘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개짐이
털 난 역신처럼 보였던가 봐요.
그래서 한바탕 또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가랍니다.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
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
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삼신할머니의 빨간 몸손님이었던 건
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
천 년 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낄낄대고 웃을 뿐 *
*문정희시집[남자를 위하여]-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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