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효림♡ 2013. 5. 11. 10:40

*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지

 

* 정선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

 

* 사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갈 때 아버지가 우겨서
딴 이름의 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던 학교 들어가 처음 교복 입고
노란 교표 달린 모자 쓰고 찍은 내 사진을
아버지는 늘 지갑 속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점심 값 아끼느라 호떡이나 인절미 사 먹고
그 먼 퇴근길 버스도 안 타고 걸어오시던
아버지는 그토록 내가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시험 잘 보고 와도 칭찬 한번 안 하던 아버지,
뭘 좀 잘못하면 눈만 흘기시던 아버지,
정말 내가 잘못한 날에는 자기 종아리 걷고
혁대 풀어, 나보고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언제까지 아버지가 지갑 속에 내 사진을
넣고 다니셨는지 모르지만, 올여름이

아버지 돌아가신 지 십 년, 지금 내 지갑 속엔

이십 년도 더 된 아이들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파트 공터에서 첫째는 동생 목을 감고

둘째는 쪼그리고 앉아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녀석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취직도 안 하고 빈둥거리지만, 지갑 속에서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깔깔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지갑 속 그 아이들을 바라보듯이,

육십 년대 후반 회사 그만두고 쉬는 동안
아버지는 이따금 내 사진을 들여다보셨겠지요
빳빳한 교복 컬러에 턱을 묻은 그 아이가
언젠가 그의 가난과 실직과 시들한 살림살이를
하루아침에 바꿔주길 바라셨겠지요
평생 울컥, 화내는 취미밖에 없었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경로당 두루마리 휴지를
한 움큼 뜯어 오다 창피당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유리문 너머 아버지 입관하실 때도,
영정사진 앞세우고 산을 오를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독한 아들이었습니다 *

 

* 두 편의 빛 

1

겨울날 콜타르 칠한 누런 침목 위

가로누운 두 줄기 철길은 정다워라

철길 위 아롱대는 햇빛 방울방울

정다워라 누가 여기 있어 깜박 잠든다

해도 때 묻은 자갈돌을 마른 입으로

핥으며 제 새끼 어루듯 어루는 햇빛,

햇빛들 노는 모습 눈에 선해라!

 

2

빛의 소리 들려, 강 건너 몸이 가는 곳

빛이 울부짖는 소리 들려, 속쓰림의 소리

탁한 강물에 부딪혀 빛이, 만신창이 빛이

강 건너 노동의 끝에 닿고, 탁한 강물에

부딪혀 사랑하는 나라, 만신창이 아이들을

부르고, 끝내 빛이 죽어도 거절하는 땅

빛의 소리 들려, 강 건너 몸이 죽는 곳

 

* 꽃 피는 아버지 
1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리이나 되나 몇리나 되나 몇리나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2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아버지는
고추나무를 심었다
밤 깊으면 공사장 인부들이
고추를 따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고추나무 키 위에
머뭇거렸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엉켜붙었다


내버려두세요 아버지
얼마나 따가겠어요


보름 후 땅 주인이 찾아와, 집을 지어야겠으니
고추를 따가라고 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낄낄 웃었다


3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랐다 물을
따라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1932년 단밀 보통학교 졸업식
며칠 전 장날 아버지 떡 좀 사먹어요
그냥 가자 가서 저녁 먹자
아버지이..... 또! 이젠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네 월사금도 내야 하고 교복도 사야 하고.....
아버지, 아버지는 굶었다 그해 모심기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어지러워 밥도 못 잡숫고
그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藥 한 첩 못 써보고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
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 심어야 할까요 살아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4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와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벌레들은
더 많은 구멍을 파고 고운 나무 가루를 쏟아냈다 보자 누가 이기나,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막았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水色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 쉬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젠 연세도 많으시고.....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뒤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 약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 

 

* 음악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 섬

  섬과 섬이 만나 자식을 낳았다 끝없이 너른 바다를 자식 섬은 떠돌았다 어미 섬과 아비 섬을 원망하면서..... 떠돌며 만난 섬들은

제각기 쓸쓸했고 쓸쓸함의 정다움을 처음 알았을 때 서둘러, 서둘러 자식 섬은 돌아왔다 어미 섬과 아비 섬이 가라앉은 뒤였다 *

 

* 비단길 1
깊은 내륙에 먼 바다에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도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 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

* 이성복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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