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한국의 아이 - 황명걸

효림♡ 2013. 5. 11. 10:41

* 한국의 아이 - 황명걸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남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멩이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뼈골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앟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머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머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야

혈혈단신의 아이야

너무나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

 

* 내 마음의 솔밭

시골에 살면서

요즈음 나의 바램은

넓고 좁도 않은 솔밭을

내 마음밭에 키우고 싶음 뿐

 

키가 크지 않으니

대충 가지런하고

적당히 굽고 휘어서

오히려 멋스러운

비산비야 아무데서나 마주치는

재래종 소나무떼

 

등이 굽어가는 늙은 아내의

조그라든 치구를 덮은

좀은 엉성해진 치모처럼

빽빽하지도 성글지도 않은 솔밭을

내 마음밭에 가꾸고 싶음뿐이로세

 

* 흰 저고리 검정 치마  

흰 저고리 검정 치마
너무 아름다워 흠갈라
운을 떼지 못하다가
생 꽁지머리에 엷은 화장
둥근 어깨에 초승달 눈썹
이밥 눈에 박꽃 미소가
조선 미인의 전형이라서
매끈한 몸매 타고 흐르는
긴 고름끝이 춤추는 듯
걸음새마저 날렵하니
아, 내 사랑하고픈 여자여라

 

* 개개비 

개개비
이름처럼 가벼운
꼬마 새

작은 몸집에
체온은 따스해
알을 품어 깐다

저 핏덩이 죽인 뻐꾸기 새끼를
피붙이로 잘못 알고
애지중지 키우고는

친어미에게 빼앗기고도
기른 정 고집할 줄 모르는
착한 심성

멍청이라 더
정이 가는
꼬마 새 개개비

너를 닮아
세상이 좀 너그러웠으면
개개비에게서 배운다

 

* 노추(老醜)를 벗고저 

치렁치렁 어깨를 덮은 긴 머리의 여자를
사랑하고 싶은 꿈은 이제는 접으려 한다
긴 머리의 여자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물결치는 탐스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사랑하고 싶은 허욕은 이제는 버리려 한다
그리고 머리를 흑인처럼 보글보글 볶은
촌티나는 시골 아주머니를 좋아하려 한다
천상 시골 아낙네를 닮아가는 볼품없는
짧은 머리의 내 늙은 아내를 사랑하고자 한다
그래야 제 분수를 알고 노추를 벗어날 터이므로

 

* 먹의 신비

곰곰이 되돌아보면 평생을
무엇 하나 반듯하고 온전한 적이 없었다
먹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 천의 색깔을
속안 깊이 머금고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고희가 가까워서야 겨우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놀랍게도 먹에서

어슴프레 푸른 기가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헛 살았구나
진정 사랑도 얻지 못했고
시랍시고 예지에 찬 한 구절 남기지 못했고
돈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고
덕행이야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으니
아직 멀었구나
아 먹의 신비여

 

* 황명걸(黃明杰)시인
-1935년 평양 출생

-1962년 [자유문학]에 시 [이 봄의 미아(迷兒)] 당선
-1976년 [한국의 아이][내 마음의 솔밭][흰 저고리 검정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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