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축우지변 - 이상국

효림♡ 2013. 5. 11. 10:41

* 축우지변(畜牛之變) - 이상국

힘이 든다

소를 몰고 밭을 갈기란

비탈밭 중간 대목 쯤 이르러

다리를 벌리고 오줌을 솰솰 싸면서

소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바뀌면

내가 몰고 너희가 끌리라

그런 날 밤

콩섞인 여물을 주고 곤히 자는 밖에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불러 나가보니

그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

 

* 어둠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 소를 팔며 

가는구나.

반추의 슬픈 식욕을 씹으며 떠나가는

그대 발굽의 아우성.

첫새벽 어둠을 한 바리씩 실어 내

건초를 바꾸던 그대 조상은

죽어서도 영영 자갈밭을 가고,

보이는구나.

굽어서 아픈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

저문 들로 다시 오는

그대 후생의 고삐가 보이는구나. *

 

* 그늘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

 

* 국수 공양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
이천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供養)을 받았다

 

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숫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

 

그러나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 것이다

 

오늘밤에도 어딘가 가야 하는 거리의 도반(道伴)들이
더운 김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 *

 

* 옥상의 가을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묻어있다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

 

* 쫄딱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 이상국시집[뿔을 적시며]-창비


* 참 쓸쓸한 봄날  

토요일 오후 진전사(陳田寺) 갔습니다

오랜 폐사지에 절을 지었다니

신라에서 부처님이 오셨대서 일부러 갔습니다

늘어지게 티브이를 보거나

먼 집안 아이 청첩도 마다하고

아카시아꽃 분수 같은 둔전리

깊어가는 물소리 따라

적광보전에 참배하고

적잖이 시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문 터 막국숫집 모두부에

소주 한잔 하고 오다가

음주단속에 걸렸습니다

 

참 쓸쓸한 봄날입니다 

* 이상국시집[뿔을 적시며]-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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