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라지밭에서 - 함민복
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린 낯빛인데요
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
폭폭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 있지요 *
* 함민복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창비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줄이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 이기철 (0) | 2013.05.20 |
---|---|
한포천에서 - 함민복 (0) | 2013.05.20 |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함민복 (0) | 2013.05.20 |
축우지변 - 이상국 (0) | 2013.05.11 |
한국의 아이 - 황명걸 (0) | 2013.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