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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포천에서 - 함민복

효림♡ 2013. 5. 20. 17:08

* 한포천에서 - 함민복

 

도끼날로 얼음장 찍어 구멍 뚫어놓으면

양잿물에 삶은 빨래 한 함지박 이고 와

살얼음 걷어내며 빨래 헹구던

어머니 시려 팔목까지 붉다 푸르던 손

그 물가 둑에서 아카시아 열매

푸르르륵 푸르르륵 삭풍에 울었지

 

물여울이 풀어지는 무릎노리 물속에 들어가

파릇파릇 자란 메나리 뜯던 누이를 위해

고지박 불 피워놓고 아직 지느러미 덜 풀려

둔한 구구락지, 붕어 잡아 구우면

지글지글 심심하고 담백하던 물고기 살

아지랑이 아지랑이에 풀 돋아나면

신이 나 맨발로 토끼풀밭 내달리다가

벌 쏘여 간지럽던 아, 조그만 발바닥

 

계집애들 곰비임비 매끄러운 돌 쌓고

돌 깔아 물가에 방을 만들고 돌그릇

밥상을 차렸지 괜한 심술에 돌담을 허물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미역을 감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면

제자리에서 깽깽이걸음 뛰고 그래도 안되면

납작한 돌로 귀를 막고 뾰족한 돌로 쪼았지

뜨끈한 물이 흐르며 귀가 뻥 뚫릴 때

막막하게 들려오던 매미 울음소리

울음 끊기의 명수, 매미 울음소리

 

추수하느라 고단해 동네 누이들 깊이 잠들었는가

사에이치 형님들 휘파람 소리 헛날다 시들고

덩달아 몸 야윈 물길 얕잡아보았던가

볏섬 실은 방앗간 마차가 물에 빠지고

어린 손들 우르르 마차에 매달렸지

용쓰던 소가 물속에서 앞발을 꿇고

방앗간집 아들 이랴! 지랴! 소리치며

물먹은 고삐로 소 목덜미를 후려쳤지

우드드득 무릎 펴지고

가까스로 물을 건넌 늙은 암소의

물길처럼 휜, 긴긴 울음소리,

단내 나던, 단내 나던 *

 

* 함민복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