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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 박성우

효림♡ 2013. 5. 23. 21:24

* 자두나무 정류장 - 박성우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

 

* 어떤 품앗이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 어매다 *

 

* 풀잡기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밭 녹차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어깨 허리 무픞, 온몸이 쑤시게 틈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저짝 몰리던 풀이 여름이 되면서, 되레 나를 몬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한테 몰린 나는

고추밭 파밭 도라지밭 녹차밭 뒷마당까지도 풀에게 깡그리 내주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

* 어떤 통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정읍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은 노인들 몇만 듬성듬성 앉아 있다 안전벨트 안허면 출발 안헐 팅게 알아서들 허쇼잉, 으름장 놓던 버스기사가 운전대 잡는다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휴대전화 소리 들려온다 어 닛째냐 에미여 선풍기 밑에 오마넌 너놨응게 아술 때 쓰거라잉, 뭔 소가지를 내고 그냐, 나사 돈 쓸 데 있간디

 

버스는 시큰시큰 정읍으로 가고, 나는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슬몃슬몃 들어가 본다

 

* 참깨 차비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문 앞에 어정쩡 앉으신다

처음 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뵌 것 같기도 한,

족히 여든은 넘어 뵈는 얼굴이다

아침잠이 덜 깬 나는, 누구시지? 내가 무얼 잘못했나?

영문도 모른 채 뒷머리만 긁적긁적, 안으로 드시라 했다

 

할머니는 불쑥 발을 꺼내 보여주신다

흉터 들어앉은 복사뼈를 만지신다

그제야 생각난다, 언제였을까

할머니를 인근 면소재지 병원에 태워다드린 일. 

시간버스 놓친 할머니만 동그마니 앉아 있던 정류장,

펄펄 끓는 물솥을 엎질러 된통 데었다던 푸념,

탁구공 같은 물집이 방울방울 잡혀 있던 작은 발, 생각난다

근처 칠보파출소에 들어가 할머니 진료가 끝나면

꼭 좀 모셔다드리라 했던 부탁,

할머니는 한 됫박이나 될 성싶은

참깨 한 봉지를 내 앞으로 민다

까마득 잊은 참깨 차비를 낸다

얼결에 한 됫박 참깨 차비를 받는다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우리집을 알아내는 데 족히 일년이 넘게 걸렸단다

대체 우리는 몇 가마니나 되는 참깨를 들쳐메고

누군가의 집을 찾아나서야 하나?

받은 참깨 한 봉지 들고 파출소로 간다 *

 

* 이팝나무 우체국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밭길로 부추밭길로 녹차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우는 법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우고

파닥 파다닥 이른 아침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들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부지런을 떤다

 

* 산사(山寺)  

배롱나무 그늘 늘어진 절간

요사 마루엔 노스님이 낮잠에 빠져 있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댄 호미와 괭이는

흙범벅이 된 몸을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코빼기도 없는 고무신이 삐죽

흙 묻은 꼬배기를 내미는 절간,

 

연잎에 엎드린 청개구리만

목탁을 두 개나 들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노스님 몫까지 하느라고

울음주머니 목탁을 울퉁불퉁 두드리고 있다.

 

* 박성우시집[자두나무 정류장]-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