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에델바이스 - 이윤학

효림♡ 2013. 5. 28. 21:30

* 에델바이스 - 이윤학    

초승달이 설산(雪山) 높이에서

눈보라에 찌그러지면서 헤매는 것,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창문보다 높은 골목길

발자국이 뜸한 새벽녘

설산 어딘가에 솜털 보송한

네가 있다기에 나는 아직도

붉은 칸 원고지에 소설을 쓰는 거다

 

너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너와는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는 거다

 

곁에 있던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같이 꾸는 거다 *

 

* 석류
올해도 열리지 않은 석류를 상상했지요
아주 오래전에 심은 것 같으나
몇 년 지나지 않은 석류나무 주위를 맴돌았지요

어느 해 봄날에
그대와 내가 심어놓은 석류나무
꽃 필 무렵엔 오지 못하고
열매 익을 무렵에 찾아와 주위를 맴돌았지요

콩새가 지저귀던 석류나무가지
내가 다가가자 콩새는 날아가고
벌어진 석류 안에
콩새가 지저귀던 소리
담겼으리라 믿었지요 * 

 

* 그날의 민들레꽃 
영안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웃음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화단으로 돌아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노란 꽃판을 바라보았다

쩌개진 빨래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마누라를 피해
들입다 뛰는 노름꾼을 보았다
그를 따르는 살이 찐 어미 발바리를 보았다
마누라 뒤를 따르는 새끼 발바리를 보았다

밥 먹다 말고 마당가에 나와
손뼉을 치는 새끼들을 보았다

저녁연기,
물오른 밤나무 동산을 감고 있는 걸 보았다
얇은 판자때기 선반을 두르고 있는 걸 보았다

풀숲에 퍼질러 앉아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숙인 사람
담뱃불을 이어 붙이던 사람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뿌리를 씻어
오지게 씹어 먹는 간암말기환자를 보았다 *

 

* 푸른 자전거 

어둠이 내릴 때 나는

저 커브 길을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있었지

저 커브 길 끝에

당신을 담을 수도 있었지

커브 길을 들어 올릴 수도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

당신이 내게 오는 길이


저 커브 길밖에 없었을 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커브 길 밖에서는 언제나

푸른 자전거 벨이 울렸지

 

* 나를 울렸다 

철근막대기로 꾹 찔러 넣은 것처럼

마루 밑구멍들이 끈끈이로 막혔다

오랜 시간 벽을 타고 흘러내린

끈끈이 액이 타일 바닥을 덮었다

쥐구멍 앞에 놔둔 끈끈이가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쥐구멍들을 쑤셔 막고 있었다

제법 덩치가 큰 쥐였으리라

사료 한 알 주워 먹으려다 그만,

끈끈이와 한 몸이 되었으리라

끈끈이를 뒤집어쓰고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구멍 앞까지 굴렀으리라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으리라

털이 뽑히고 가죽이 늘어나

몸이 헐렁해질 때까지

울음소리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끈끈이로 구멍을 틀어막았으리라

자신의 구멍으로 사라진 쥐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 구멍으로 나오지 않은

쥐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어디론가 맞구멍을 뚫고 나갔을

끔찍한 쥐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 메타세쿼이아 

너와 나의 창문 밖으로

끝이 없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펼쳐져 있으면

 

메타세쿼이아 가지에선 봄마다

부드러운 연둣빛 잎이 둥지 속

갓 태어난 새털처럼 돋아나

무수히 날개를 달고 날아갔으면

 

미래가 없는 곳으로도 날아갔으면

피라미드가 커서 피라미드가 커서

이 세상과는 상관없이 살아갔으면 *

 

* 7번 국도변 
검정 모자를 눌러쓴 눈 나쁜 아비와
늦둥이 딸아이가 캥거루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왼손을 내밀어 코스모스를 훑는 딸아이와
홀아비 냄새를 뒤로 피우는 아비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7번 국도변을 역주행으로 지나간다
영재유치원 가방이 핸들에 걸려 지나간다
체인 집 긁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간다
신문지에 말아 싼 제수용 북어포가
짐칸 고무 바에 묶여 지나간다
창문을 연 시외버스가
커튼을 쳐 매고 지나간다
아비의 가발과 모자가 날아간다
아비는 자전거를 멈추고
받침대를 세워 올린다
허옇게 드러난 아비의 대머리
놀란 딸아이가 몸을 틀어
허둥대는 아비를 바라본다
속내를 다 드러낸 코스모스가
끊임없이 피어 있는 7번 국도변
가발을 씌워주는 딸아이와
부끄러운 아비가 마냥 웃고 있는 7번 국도변 *

 

* 이윤학시집[나를 울렸다]-문학과지성사

 

* 이윤학시인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2003년 김수영문학상, 2008년 동국문학상수상

-시집 [먼지의 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나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