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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골 시편 -부레옥잠 - 김신용

효림♡ 2013. 5. 28. 21:37

* 도장골 시편 -영실(營實) - 김신용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

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한 씨 하나만 남겨

다시 한 생을 얻는 일 

 

* 도장골 시편 -부빈다는 것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물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입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

 

* 도장골 시편 -부레옥잠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 도장골 시편 -넝쿨의 힘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 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

 

*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

 

* 김신용시집[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2005년 천상병시상, 2006년 노작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환상통][도장골 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