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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 장석남

효림♡ 2013. 5. 28. 21:43

*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섬진강에서 - 장석남

어미 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 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

 

저만치 바람에

들菊 그늘이 시큰대고
무릎이 시큰대고
적산가옥
청춘의 주소 위를 할퀴며
흙탕물의 구름이 지나간다

아,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 *

 

* 소나기 

 

남천(南天)에서
천둥소리 하늘을 깨치는가 싶더니
머위밭을 한꺼번에 훑는
무수한 초조함들
처럼
이제 어디에라도
닿을 때가 되었는데
되었는데

소나기 지나가며
외딴 어느 집 처마 밑에 품어 준
열서넛 남짓
나일론 옷 다 젖어 좁은 등허리 뼈 비쳐 나는
소년, 처연한 머리카락
서 있는 곳
그 토란잎 같은 눈빛이 가 닿는 데
그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가는 데
그런 데에 닿을 때 되었는데,.....,

천둥이 하늘을 깨쳐 보여 준 그곳들을
영혼이라고 하면 안 되나
가깝고 가까워라
그 먼 곳

이 땅에 팍팍
이마를 두드리다 이내
제 흔적 거두어
돌아간
오후 한때
소나기 행자(行者)들
쫓아간
내 영혼

겨울 어느 날
눈 오시는 날
다시 보리라
빈 대궁들과 함께 서서
구경꾼처럼
구경꾼처럼
눈에 담으리라 *

* 장석남시집[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지

 

*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의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 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 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 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 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 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 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 간다 * 

* 장석남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지, 2005

 

* 나의 유산은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장마 큰물이 덮었다가 이내 지쳐서는 다시 내보여주는,

은근히 세운 무릎 상부같이 드러나는

검은 징검돌 같은 걸로 하고 싶어

 

지금은,

불어난 물길을 먹먹히 바라보듯

섭섭함의 시간이지만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꽃처럼 옮겨가는 목숨들의

발밑의 묵묵한 목숨

과도한 성냄이나 기쁨이 마셨더라도

이내 일고여덟 형제들 새까만 정수리처럼 솟아나와

모두들 건네주고 건네주는

징검돌의 은은한 부동(不動)

나의 유산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