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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밭에서 - 함민복

효림♡ 2013. 5. 20. 17:07

* 도라지밭에서 - 함민복

 

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린 낯빛인데요

 

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

폭폭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 있지요 *

 

* 함민복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