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섬진강 32 - 김용택

효림♡ 2013. 5. 20. 17:09

* 섬진강 32 - 김용택

문득
잠에서 깼다.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은 어머니 생각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어머니의 뒷말을 찾던 아내는 옆에 잠들어 있다.
기운 달빛은 마을을 빠져나가고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소슬바람 결을 따라

풀벌레 울음소리가 끊긴다.
문득 생이 캄캄하다.
별빛 하나 없는 밤에도 강을 건너
콩밭의 경계를 찾아 더듬거리던 뿌리를 거두어들이며

어머니가 강가에 선다.
아가, 강 저쪽이 왜 이리 어둡다냐.

강물이 내 발밑에 와서 죽어나가는구나.
어머니, 밭들이 다 묵어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이제 나도 돌아갈 일만 남았다.
물이 흐르는데, 물이 흐르는데, 강을 건널 힘이 없어
이제 내 눈이 저 건너 강기슭에도 가닿지 못하는구나.

저 밭, 내 생이었던 저 밭의 곡식들, 내가 내 눈에 가물거리는구나.

밭을 매던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 갔다냐.

내 살을 허물어준, 내 손톱을 가져간 저 밭에 자갈들이

뒹굴며 나를 부르는구나. 숨이 차다.

아무것도 회수할 수 없는 삶이 이리 허망하다.

퍼낼 수 없는 오래 묵은 생의 슬픔이 고인다.
그러나 무엇이 슬픈가.

슬픔도 환하게 강에 비운다.
잠든 어머니의 강가에는
구절초 꽃이 피어 있다.
이 발걸음으로 앞선 저 물살을 어찌 따라잡을까.
일생이 강이었던 어머니의 옛 강에 나는 누웠다.
새벽이다. *

 

* 김용택시집[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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