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님은 주무시고 - 서정주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베갯모에
하이옇게 수(繡)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鶴)이다.
그의 꿈속의 붉은 보석(寶石)들은
그의 꿈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보석(寶石)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놓은 순금(純金)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베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
* 서정주시집[미당 서정주]-문학사상사
*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꽃을 한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나가면서 연계(軟鷄)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외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들여진 옥색(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그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白紙)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알아듣고 꽃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외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가오. *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은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
* 서정주시집[미당 시전집]-민음사, 1994
*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져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서정주시집[안 끝나는 노래]-정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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