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측백나무가 없다 - 문태준

효림♡ 2013. 9. 28. 19:46

* 측백나무가 없다 - 문태준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

참새 떼가 모래알 같은 자잘한 소리로 측백나무에서 운다

그러나 참새 떼는 측백나무 가지에만 앉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참새 떼는 나의 한 장의 白紙에 깨알 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감씨를 쏟아놓고

허공 한 촉을 물고 그 긴 끈을 그 긴 탯줄을 저곳으로 저곳으로 끌고 가버리고 끌고 가버리고

다만 떼로 모여 울 때 허공은 여드름이 돋는 것 같고 바람에 밀밭 밀알이 찰랑찰랑 하는 것 같고

들쥐 떼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고 그물에 갇힌 버들치들이 연거푸 물기를 털어내는 것 같다

측백나무 곁에 있었으나 참새 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  

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 *

 

* 극빈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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