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시인의 말 - 신영배

효림♡ 2013. 9. 28. 19:35

* 시인의 말 - 신영배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속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
내가 사라지고 시 혼자
컴퓨터 모니터 속 A4용지 왼쪽 정렬
글꼴 신명조 글자 크기 12에 맞춰
한 줄 한 줄 써내려가거나
유품을 수거한 비닐 팩 속에서
뿌려진 피와 함께 수첩의 남은 페이지를
쓱쓱 써내려가는
그런 시 *

 

* 나의 아름다운 방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오후 네 시 방향으로
나는 물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흠뻑 젖은 주둥이로 다리를 조금 흘린다
관 뚜껑을 적시는 문장

화분은 고양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깨진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할퀸다
씨앗이 퍼진다
갈라진 손등에 고양이를 묻고
해 질 녘 손의 음송

오후 여섯 시 방향으로
나는 기다란 악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붉은 손가락으로 관 속의 다리를 연주한다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

 

*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옥상에 앉아 있던 태양이
1층 유리창으로 내려온다
유리 속을 걷는 구두는 반짝인다

귀가 접힌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으로 지상에 없는 음악이 올라온다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는다

나의 아름다운 바지는 다리가 하나이다
지퍼 하나, 주머니는 넷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여섯 시 꽃에 닿는다
닫히는 문에 손을 찧으며
여섯 시 꽃으로 들어가 여섯 시 꽃으로 나온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지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잠겨 있을
내 그림자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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