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산경(後山經) 네 편 - 황지우
봄 밤
소쩍새가 밤새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피로써 제 이름을 한 천만 번 쓰고 나면
일생이 두렵지 않을까
누가 나를 알아볼까 두근거리는 것도
내 여직 거기에 붙들려 있음이니
어두운 봄밤 돌담길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내가 못내 피하면서도 사람이
내게 오기를, 어서 내게 오기를
조마조마하지 않았던가
내 발자국 소리 들은 멧새가
건드려놓은 잔가지들처럼
내 마음 뭔가 기척에 미리 놀라 이리 흔들거리니
문앞의 不在가 나의 부름을 기다리게 했었구나
골목 끝, 활짝 형광등을 켠 살구꽃나무 한 그루
아직 세상에 있으니 다행이다
목숨 있을 때 살아야지
밤새 소쩍새 마을로 내려와
제 이름 대며 딸꾹질한다
여름 낮
모내기 전까지 참았다가 벼모가지 내밀 때까지 세 번 피었다가
지는 百日紅
하늘로 저승을 밀고 가는 꽃상여 따라가듯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얼굴을
뿔겋게 化粧해준다
畵家 金京柱가 취한 듯,
여럽게,
웃고
소리 쾍 질러
어화 벗님네야아
여그서 살다 가소오
醉木이 藏溪亭 개울물로
어찔어찔 허니 내려온다
가을 저녁
저 아래 방죽둑 어욱새 솜털에
알 낳는 저녁 해
마당에 허리 꾸부린 할머니
나락을 거둔다
슬레이트 지붕 위 홍시들이
똥누러 갈 때 켜놓은
點燈 같다
다 살아도 남는 건
열매 속은 붉은 불인 듯
할머니 손바닥은 바삭바삭하고 따뜻하다
겨울 아침
아침부터 골짜기에는 눈발 퍼붓고
이제는 세상과 끊겼다는 절박한 안도감
눈발이 간간이 처마끝 風磬을 때리고
양철 물고기가
눈을 피해
땡그랑, 땡그랑
방안으로 들어온다
깃들일 데라곤 몸뿐이니
추운 소리여
잠시 나한테 머물다 가소
情이 많아 세상을 뚫고 나가지 못하니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은
세상을 죽어라 그리워하는 것이려니
혹시 사람이 오나
빗자루 들고 길 밖으로 나간다 *
* 황지우시집[게 눈 속의 연꽃]-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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