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견디는 잎새 - 공광규

효림♡ 2013. 11. 18. 09:00

* 견디는 잎새 - 공광규 

누구에게나 여름은 짧구나

시간의 단두대 앞에서

고개 떨구지 않는 자 없다

서리가 한 번 치니

푸른 잎들 다 내린다

내일 바람 불면

남아 있을 잎 없겠다

동지들 다 가고 없는데

오는 겨울 어떻게 맞을 것인가

다시 길을 묻는 수밖에

질문을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져

엄혹한 현실의 매질 앞
사소한 것에 화내거나 목숨 걸지 않고
내 안의 나약함과 부도덕을 먼저 때려죽이며

부드럽게 견디는 수밖에. *

 

* 욕심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 

 

* 뿌리의 힘

나를 자르지 말라
네 칼이 먼저 상하리라
나는 뿌리가 있어
내 몸을 계속 키울 수 있나니
시간이 우리의 승패를 결정하리라

나를 밟지 말라
네 구두가 먼저 닳아 없어지리라
나는 뿌리가 있어
같은 몸 계속 밀어 올릴 수 있나니
네 무릎이 먼저 꺾이리라

나는 뿌리의 힘으로
겨울 나고 꽃 피우고
타는 가뭄에 견디며 대지를 붙들고 있나니
내 억센 뿌리의 손아귀에
네 뼈가 먼저 부러지리라.

 

* 공광규시집[지독한 불륜]-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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