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 맹문재

효림♡ 2013. 11. 13. 09:36

*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 맹문재 
먼 길에서 바라보는 산은 가파르지 않다

미끄러운 비탈길 보이지 않고

두릅나무 가시 겁나지 않고 독오른 살모사도

무섭지 않다

먼 길에서 바라보는 기차는 한산하다

발 디딜 틈 없는 통로며

선반에 올려진 짐꾸러미 보이지 않는다

 

먼 길에서 바라보면

다른 사람의 수술이 아프지 않다

불합격이 아깝지 않고

자살이 안타깝지 않다

배고픔과 실연이 슬프지 않고

아무리 글을 읽었어도 강의 깊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길은 먼 데서 시작된다

누구나 먼 길에서부터 바위를 굴릴 수 있고

도랑물 소리 들을 수 있다

장기적금 첫회분을 부을 수 있고

못난 친구들과 잔 돌릴 수 있고 심지어

노동시의 슬픔도 읽을 수 있다

 

새벽에 나서는 설 귀향길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

 

* 봄

불타버린 낙산사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다가
이렇게 웃어도 되는가?

날이 저물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연둣빛 촉을 틔운 봄이
낙산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가 쉬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

나는 그 모습이 좋아
폐허의 낙산사에서 미소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

 

* 시간을 읽으면 
시간을 읽으면
심장에 좋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하늘에 없는 별들이 행간에 보인다
별들의 밝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나
수평선을 넘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

시간을 읽으면
내가 도착할 역이 떠오른다
주위에는 향긋한 풀들이 침대처럼 펼쳐져 있고
흘러가는 강물이 보인다
팔락거리는 숲의 바람을 흠뻑 들이마셔
심장을 악화시키는 기운을 씻어내고
열차 바퀴를 힘차게 돌린다

첫사랑을 고백하듯이 시간을 읽으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들 듯
나의 심장은 밝아진다

 

* 의자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 가만히 있다

창밖은 언 길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들로 소란하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를 바라본다

 

나의 일은 그로부터 먼 야적장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호루라기를 부는 것이었다

햇빛이 좋거나 바람이 시원한 날도 많았을 텐데

왜 바람이 심한 날만 생각나는 걸까

 

나는 그와 다른 태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야적장에서 쓰러졌을 때

그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말없이 나를 안아준 것이다

 

나는 다시 야적장으로 가려고

어두운 방 안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창밖은 언 길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들로 소란하다

* 맹문재시집[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

 

* 탱자나무 

해일처럼 밤이 몰려와도 탱자나무는 어깨를 풀지 않는다

 

무서운 기색도 없이 전선을 응시하고 부력과 풍자를 모르는 자세로 진지를 구축한다

 

황사도 태풍도 경적도 저 견고한 진지를 뚫지 못하리라

 

유언비어도 규정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저 거대한 발밑에 깔리리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탱자나무는 전진한다

 

칼도 뽑았다

 

퇴각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온몸을 가시로 무장했다 

* 맹문재시집[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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