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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김상미

효림♡ 2013. 12. 12. 09:16

* 겨울 이야기 - 김상미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문 열고 있었다
문 밖 짧은 해거름에 주저앉아 햇빛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북향,
쓸쓸한 그 바람소리 듣고 있었다

어떤 누구와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지 않을 때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는 창
나뭇잎 다 떨어진 그 소리 듣고 있었다

세상 모든 추운 것들이 추운 것들끼리 서로 모여
내 핏속 추운 것들에게로 다가와
똑 똑 똑
생의 뒷면으로 가는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있었다

물결치는 겨울 긴 나이테에 휘감긴 울창한
숲 향기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무두무미한 생의 입김들이
다시 돌아올 봄 문턱에다 등불 환히
켜는 소리 듣고 있었다

마치 먼 길 혼자 달려온 천 년 전 겨울
천천히 가슴으로 녹이는 것처럼
내 몸 안의 겨울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실려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듣고 있었다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

* 김상미시집[검은, 소나기떼]-세계사

 

* 사랑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 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 김상미시집[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시작

 

* 무너진 상자 
얼마 동안 상자 안에 갇혀 있었을까? 상자 안에 갇혀 있었을 땐 오랫동안 빛을 쬐지 못해 아직도 세상이 캄캄한 줄 알았다. 그래서 누가 내게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최대의 축복으로 여겼다.


그러다 나는 보았다. 결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낮게 낮게 조용조용 춤추는 푸른빛! 나는 손을 뻗어 그 푸른빛 하나를 땄다. 십자형의 네잎클로버! 그러자 상자 안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면서 상자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너진 상자를 넘어 네잎클로버를 가슴에 품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달빛도 밝아졌다. 달빛이 점점 밝아질수록 내 가슴에 품은 네잎클로버도 쑥쑥 자라났다. 나는 달리고 또 달리면서 네잎클로버가 내뿜는 향기를 맡았다.

희망의 향기! 그 향기를 맡으며 나는 나를 상자 안에 가두고 내 자유를 빼앗고 내게 먹이만을 준 그들을 하나하나 떨쳐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달리는 이 길 위에서 붙들지 못하리라.

 

* 민들레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꽃,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 날 그 다음 날 찾아가 보면, 어느 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 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 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

* 김상미시집[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