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봄날 - 이문재

효림♡ 2015. 3. 26. 09:00

* 봄날 - 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

 

* 봄날 2  

봄이
새끼발가락 근처까지 왔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어린 날이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까치발을 하고 멀리 내다본다.
봄날이 환하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죽음도 기지개를 켠다.
내 안팎이
나의 태어남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 낯설지 않다.

 

봄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흙냄새가 바람에
바람이 흙냄새에 얹혀진다.
햇살이 봄날의 모든 곳으로
난반사한다 봄날의 모든 것이
서로 반가워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우리 우리들이다.
새끼발가락이 간지러운 이른 봄날
나는 이렇게 우리다.
우리들이 이렇게 커질 때가 있다.

 

* 봄날 입하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 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어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라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신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

 

* 이문재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