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반성 - 김영승

효림♡ 2015. 3. 5. 09:00

*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

 

* 반성 72

나는 대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기 하는 것 같다.

만루 때의 휘볼처럼

밀어내는 것 같다

죽기는 싫어서 억지로 밥을 먹고

먹으면 먹자마자

조금 있으면 곧 대변이 나온다.

안 먹으면 안나온다.

입학도 졸업도 결혼도 출산도

히히 밀어내는 것 같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것 같다.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

 

* 반성 100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검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

 

* 반성 569

술 마시면

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 所有의

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正立方體가 아닌 球形의

내 家屋으로

영원한 家屋으로

 

보증금도 月稅도 없는

계약서도 영수증도 없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수도요금도 청소요금도 없는

무엇보다 전기요금 없는

완전 투명하고 완전 불투명한

완전 경계 없고 완전 독립된

담도 없고 문도 없는

 

마을 같고 도시 같고 국가 같은

쥐구멍 같은 집

子宮 같은 집 膣같은 집  

집게(蟹)의 집 같은 집

 

술 마시면 

主人이 되고 싶다. *

 

* 반성 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 주신다. *
 

 

* 반성 704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 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 김영승시집[반성]-민음사

 

* 반성 902

하나님 아버지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머리가 띨띨해져 갑니다

고맙습니다

 
* 아는 놈 

"아는 놈야?"

"모르는 놈인데?"

턱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

모르는 놈이다 *

 

조금이었으므로 다였노라

이렇게 풍성히, 풍만히, 탐스럽게

나팔꽃이 수십, 수백 송이 활짝 피었으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아니 이렇게 나팔꽃이 활짝 핀 게 좋은 일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 以前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