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효림♡ 2015. 2. 27. 09:00

*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

 

*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 천둥
마른 번개가 쳤다.
12시 방향이었다.

너는 너의 인생을 읽어보았느냐.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어보았느냐. *

 

* 연금술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지지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튀기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봄 두릅은 아침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

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

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

화엄경을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

 

* 풍등(風燈)

저것은 연이다.
연실 없는 연
거기 몸을 태우는 불꽃을
연실로 만드는 저것은 연
불의 연이다.

저것은 바람이다.
제 몸을 태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제 몸을 덥혀 스스로 가벼워지는
저것은 소신공양이다.

저것은 별
지상에서 올라가는
마음이 올려 보내는
마음의 별이다.
마음으로부터 가장 멀어 질수록
마음이 환해지는 별이다.

저것은 소진이다.
자기 몸을 다 태워야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가장 높이 날아올라
자기 몸을 불살라버리는
저것은 가장 높은 자진이다.
승화다.

아침 이슬이
유난히 차고 맑은 까닭이다. *

 

* 이문재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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