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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령 - 이문재

효림♡ 2015. 2. 27. 09:00

* 자작령 - 이문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을 크게 틀어놓고
오월 초순에서 치고 올라가는 것이다.
자작나무가 촘촘하대서 고개 이름이 자작령
자작령 영마루에 먼저 가 있으려는 것이다.
강 한 가운데를 따라 그어진 도계(道界)를 넘을 때
간밤 어금니 빠진 꿈을 잠들기 이전으로 던져버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몰입하려고 애를 썼다.
바다로 넘어가는 길과 강의 상류에서 내려오는 길이
열십자로 만나는 곳에서 안개가 산안개로 바뀌었다.
전조등 불빛이 안개를 뚫지 못하고 난반사한다.
소실점들이 한꺼번에 차창을 덮는다. 
소년합창이 오르내리는 하모니와 옥타브에 집중한다.
햇빛이 계곡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산안개 순식간에 걷히고 시야가 트이리라.
길섶으로 자작나무 하얀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작령이다 자작령 고갯길은 파고들 수 있을 때까지
산의 가슴팍을 파고든 다음에야 커브를 틀었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놓아버리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자작령 너머에서 넘어오는 누군가에게는 내리막일
오르막은 굽이가 심해 멀미가 날 지경이다.
귀가 뻥 뚫리는가 싶더니 햇살 한 무더기가 쏟아졌다.
오월 초순의 산들은 두드러기가 덧난 듯 부풀어
씩씩거리며 더운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마음은 벌써 자작령 영마루로 치고 올라간다.
하지만 기린의 기관지처럼 구부러져 있는 오르막길은
직선을 버리라 한다. 치고 오르는 성깔을 버리라 한다.
핸들을 끝까지 돌렸다가 다시 끝까지 돌리며
잔뜩 앙다물었던 하악골을 좌우로 흔들어 풀어놓고
나무십자가 소년합창의 공명을 다시 따라간다. 
천천히 가자 마음아 몸과 더불어 천천히 오르자.
어느 틈에 소실점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 있었다.
놓치고 싶은 곳에서 놓치는 사랑이 가능하겠느냐.
너보다 우리보다 내가 먼저 자작령에 닿아야 한다.
영마루에 다 와가는지 굽이가 느슨해지고
자작나무 흰 줄기 사이로 순한 연두가 번지고
오월 초순의 햇살은 일제히 수직에 가까워지고
마음은 몸 곁에서 한 뼘도 떨어지지 않는다.
자작령은 가장 높은 곳에서 굽이를 버리고
긴 경사를 버리고 접시안테나 같은 우묵한 분지였다.
너보다 우리보다 내가 먼저 온 것이다.
자작령이 다시 급한 경사와 굽이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무릎 꿇어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접시 같은 분지가 한곳에 초점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저 한 점이 자작령 정수리였다.
산탄처럼 퍼져나가던 빛이 한 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빛이 다시 모여 뜨거운 강렬한 열로 만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저 한 점에다 죄다 꺼내놓았으니
죄보다 독했던 오해에서 치명적이었던 무관심까지
본능보다 깊숙했던 욕심까지 다 끄집어내 불태웠으니
나였던 모든 것을 바치고 무릎 꿇었으니
오라 직선으로 치고 오지 말고 굽이와 경사를 따라오라.
네가 너였던 우리가 우리였던 것 그대로
어서 오라 자작령 영마루 옴팡한 정수리로 오라.
빛이 다시 열로 만나는 한 점 작은 태양으로 오라.
새로 태어난 새카만 흰 태양으로 오라. *

 

* 이문재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