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 - 황금찬
쌍계사
계곡의 물소리를
청자 매병에 담아
네게 보내노라
그대 붓을 들어
피아골의
구름을 그려보게나
* 선물 - 정희성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
* 정희성시집[그리운 나무]-창비, 2013
* 햇빛의 선물 -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 착한 선물 - 정일근
여수 바다서 듬뿍 건져 택배로 보낸 권 선생님의 멸치
은현리 도둑고양이들이 먼저 포장을 찢어 나눠 먹고 있다
선물(膳物)에 들어 있는 착할 선(善)자를 맛있게 먹고 있다
오랜만에 푸른 바다를 마시는 은현리 친구들 배부를 때까지
나는 감나무 뒤에 숨어 숨죽이며 기다려야 했다.
* 정일근시집[방!]-서정시학
* 선물론 - 정일근
저기 오징어 스무 마리 달아난다. 바닷가 시인으로부터 서울 시인에게로. 두 해 전 '문학의 해'를 열던 봄. 바다 같은 시를 이야기하러 시 같은 바다를 찾아온 서울 시인이 자신이 장만한 오징어 회 맛있게 먹던 모습을 바닷가 시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징어를 떠나보내는 손이 수줍은 듯 붉어진다. 가만히 바라보니 저 손이 시인의 손이다.
나는 먼저 오징어들의 내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 바닷가 시인의 낮고 작은 마당, 마당이 낮아서 겨울햇살은 순금처럼 귀한데, 햇살은 담을 넘어서 잠시 찾아왔다 돌아가버려 시인은 밤마다 난바다의 소금바람과 방어진 하늘의 별빛을 불러 오징어를 말렸다. 서울 시인의 연치를 헤아려 적당히 말렸다. 적당히란 말에 바닷가 시인의 푸른 마음이 들어 있다.
나는 그 바닷가 시인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살다 바다가 되어버린 사람, 불혹의 나이 끝자락에 시인 이름표 달고 지천명의 나이 들어서는 야간학교를 다니는 그 사람, 고된 삶에서 달콤한 잠을 쪼개 말린 오징어지만 바닷가 시인은 부끄럽다. 제 몸인 바다에서 주머니를 열고 드리는 여비가 잔돈인 것만 같다.
그러나 오징어들은 오랫동안 서울 시인의 안주가 될 것이다. 적당히 말려 씹기 좋은 부드러움의 선물을 쭉쭉 찢어 먹으며 서울 시인은 바닷가 시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마다 서울 시인은 자신의 입 속에서 터지는 바다의 시를 읽을 것이다. 생각하면 그 오징어들도 신이 나 그 바다로 돌아가며 자신들을 홀린 집어등보다 더 빛날 것이다. 선물이란 말에 숨어 있는 착한 선자처럼.
* 선물 - 강인호
내 너무 가난하여
그대에게 줄 것이 없네
헤진 마음 한 자락
곱게 다려 보내드리거니
아름다운 사람 만나
눈물 흘릴 일 있거든
접었던 마음 꺼내어
그대 손수건이 되었으면
* 선물 - 나태주
받는 것은 될수록 줄여서 받고주는 것은 될수록 늘려서 주리
그대 내게 주시는 것
비록 작더라도
큰 상으로 알고 받겠으니
내가 주는 것 비록 크더라도
작은 별로 바꾸어 받으시라.
* 선물 1 - 나태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구절이면
한아름 바다를 안은 기쁨이겠습니다 *
* 선물 - 나태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셔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 인생의 선물 - 사무엘 울만
나는 가시나무가 없는 길을 찾지 않는다
슬픔이 사라지라고도 요구하지 않는다
해가 비치는 날만 찾지도 않는다
여름 바다에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햇빛 비치는 영원한 낮만으로는
대지의 초록은 시들고 만다
눈물이 없으면 세월 속에
마음은 희망의 뿌리를 닫는다
인생의 어떤 곳이라도
정신을 차려 갈고 일군다면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이
손이 미치는 곳에 많이 있다.
내 손바닥에 박힌 쇠 가시를 빼내기 위해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칼날에서 시선을 피한 채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빼내셨다,
내 생각으론 나를 죽일 것 같았던 바로 그 쇳조각을
이야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두운 빛깔의 물로 채워진 우물 소리와도 같고
기도 소리와도 같던 내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두 손이 기억에 선연하다,
부드러움으로 넘치는 두 개의 측량 도구와 같던 아버지의 두 손이,
내 얼굴에 얹으셨던 아버지의 손길이,
내 머리 위로 들어올리셨던
훈육의 불길과도 같던 아버지의 손길이
만일 당신이 과거의 그날 오후로 들어갔다면,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어떤 한 남자가
한 소년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은빛 눈물을, 자그마한 불길을 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그리고 그 소년을 따라갔다면,
이곳에, 내가 아내의 오른손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이르렀으리라
보라, 아내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내 아내의 엄지손톱을 쓰다듬어 내리는지를
가시를 뺀 다음 이를 들어올릴 때의 내 모습에 주목하라
아버지가 이렇게 내 손을 잡으셨을 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그때 나는 쇳조각을
내 두 손가락 사이에 쥐고서
'나를 파묻을 쇳조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작은 암살자,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내 가슴 깊이 파고 들어갈 광물질'이라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한 내 상처를 치켜들고
'죽음이 이곳을 방문했었다'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무언가 간직할 것을 받았을 때
아이가 그렇게 하듯이
아버지에게 뽀뽀를 해드렸을 뿐 *
* 선물 - 기욤 아폴리네르
당신이 원하시면
나의 명랑한 아침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또한 당신이 좋아하는
나의 빛나는 머리카락과
나의 푸르스름한 금빛 눈을 드리겠어요.
당신이 원하시면
따사로운 햇살 비치는 곳에서
아침에 눈뜰 때 들려오는 모든 소리와
그 가까이 분수에서 흘러내리는
감미로운 물소리를 당신께 드리겠어요.
이윽고 찾아든 저녁노을과
내 쓸쓸한 마음으로 얼룩진 저녁
조그만 내 손과
당신 마음 가까이
놓아둘 나의 마음을
기꺼이 당신께 드리겠어요. * - 신현림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