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문인수 시 모음 2

효림♡ 2014. 4. 4. 21:23

* 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
* 2007  미당문학상수상작품
 
*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

* 문인수시집[배꼽]-창비

 

*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러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 각축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 벽화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손에 몰렸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긴 것일까.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 같다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비계(飛階)를 내려오는 석양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지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오래 발린다 *

 

* 뒷짐

국도에서 바닷가를 향해 갈라지는 길

입구에, 한 할아버지가 힘겹게 발걸음을 떼고 있다.

잔뜩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길이 오히려

노인의 배꼽 쪽으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느라 여러 굽이 시꺼멓게 꿈틀대며 애를 먹는다.

우리는 휑하니 차를 몰아 이 곳 저 곳 포구를 돌아보고

올망졸망한 섬 풍경 앞에 내려 히히거리다 다시

국도 쪽으로 되돌아 나왔다. 그 갈림길 입구, 거기서 이제 겨우

삼 백여 미터 앞에서 또

한참 전에 지나친 노인을 만났다. 지팡이도 없는 더딘 발걸음의 저 오랜 말씀,

ㄱ자의 짐은 ㄱ자다.

흐린 시선으로 짚어낸 길바닥엔 시시각각 채 썬 중심이 촘촘하겠다.

그 등허리에 실려 낱낱이 외로운 열 손가락,

두 손끼리 가끔 매만지며 느리게 간다. *

* 2011'작가'가 선정한[오늘의 시]-작가 

 
* 정선 가는 길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릇재 새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것 같은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돌아 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

 

*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 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울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 만금이 절창이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

* 2006 미당문학상수상작품집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물 시 모음  (0) 2014.05.24
찔레꽃 시 모음   (0) 2014.05.18
눈물 시 모음  (0) 2014.02.28
바람 시 모음  (0) 2013.11.28
손 시 모음  (0) 201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