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 김춘수
자목련이 흔들린다.
바람이 왔나보다.
바람이 왔기에
자목련이 흔들리는가 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자목련까지는 길이 너무 멀어
이제 막 왔나 보다.
저렇게 자목련을 흔드는 저것이
바람이구나.
왠지 자목련은
조금 울상이 된다.
비죽비죽 입술을 비죽인다. *
* 바람 - 신경림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니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촉촉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 바람의 노래 - 이성선
수우족은 아니지만
어릴 때 들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내 영혼은 바람이 주셨다는 것을
지금도 걸으면서 느낀다
내 눈동자 속의 눈동자에서는
그분과 하나다
나는 이것을 그치지 않고
노래하기를 열망한다.
새벽 풀잎에 별이 흐를 때
나의 귀는 듣는다
밭고랑 감자가 냇물에게 들려주는 노래
메꽃 속에 늦잠 자는
벌레의 잠꼬대 소리
바람은 이들로 향기롭다
이들은 내게 와서
들판으로부터 나를 키웠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
수우족이 그렇게 살고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 수우족-미국 대초원 지대에 거주하는 평원 인디언 부족
* 바람의 노래 -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마종기시집[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
* 바람과 더불어 -하나 - 장석남
동구 귀퉁이에 이빨이 빠져 물러난 접시 하나
접시 속에 다급한 사랑으로 괴어 있는데
나무라지 않고
달 지네
달 지는 언덕
드렁칡 위에
달리아 꽃 절창이네
관광버스에서 울긋불긋 내리는 가을
노을 속에서
붉게 짖는 사과들
이빨 빠져 물러난 접시 속에
다급한 사랑으로 괴어 있을 때
* 장석남[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 바람 부는 날 - 박성룡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머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언제 어디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삽질을 하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다 *
* 김해자시집[축제]-애지
* 바람의 내력 -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
*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
*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 도종환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빗발이 멈추면 나도 멈출까
몰라 이 세상이 멀어서 아직은 몰라
아픔이 다하면 나도 다할까
눈물이 마르면 나도 마를까
석삼년을 생각해도 아직은 몰라
닫은 마음 풀리면 나도 풀릴까
젖은 구름 풀리면 나도 풀릴까
몰라 남은 날이 많아서 아직은 몰라
하늘 가는 길이 멀어 아직은 몰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바람과 그늘 - 함성호
돌아와
북한산에 산수유 벚꽃 보러 갑니다
아직 잠은 오지 않습니다
어제는 후원의 층층나무 그늘 아래서
식구들과 전을 부쳐 먹으며
놀았습니다
그게 답니다
가다 못 가면 쉬어 가지요
이젠 노래도 지쳤습니다
앞산 벚나무는 새 音을 찾았는지
유난히 환하게 숨어 있습니다
바람과 헤어진
바다로 가는 후박나무 길에는
연등이 줄줄이 걸려
중국집 남경관의 붉은 간판이
무색해집니다
사월 초파일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물결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무런 시절도 그리워하지 않고
나는 환한 한 송이 앞에서
잡니다
어두운 것은 그늘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
* 바람 - 반칠환
저놈은 대단한 독서광 아니면
문맹이 틀림없다
열흘째 넘기지 못한 서적을
돈 세듯 넘겨놓고,
포플라 잎 팔만대장경을
일제히 뒤집어 놓은 채 달아난다 *
* 삼월의 바람은 - 이성복
삼월의 바람은 순하지 않다
연립 주택 옥상에 올라
기저귀를 내거는 뚱뚱한
새댁의 느린 걸음걸이
삼월의 바람은 출정하는 배들의
돛폭처럼, 흰 기저귀 하늘로
밀어올리고 뒤뚱거리는 새댁의 모습
귀지처럼 가볍게 눈앞에 떤다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 여러 번 살아도 다시 그리운,
*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 박정원
기다림은 그대로 좋은 것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매듭짓지 마라
있는 그대로 마음 그대로
너는 한 가닥 바람으로
영원 속에 머물 존재리니
지금 네가 움켜쥐고 있는 너는
언젠가는 영원으로 돌려보내야 할
작은 빛이리니 *
*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 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