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가을 시 모음 4

효림♡ 2013. 10. 15. 10:07

* 가을 편지 - 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 저물어가는 풍경 - 조오현

울고 가는 거냐 웃고 가는 거냐

갈대 숲 기러기들 떼 지어 날고 있다

하늘도 가을 하늘은 강물에 목이 잠겨 있다 *

 

* 가을에 당신에게 -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 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 가을 편지 - 고정희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류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뜨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 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시인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 가을의 노래 - 박용래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 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後園)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 위
뉘가 밤을 절망(絶望)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동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寢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太陽)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 가을 엽서 - 김윤배 

젖은 가슴에 머리 묻고 있던 갈대꽃 떠나간 후 당신 가슴 물결 이는 모습 보았습니다

강물 아래 내가 알 수 없는 비밀한 세월 일렁이면 큰 육신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낍니다

당신은 나의 생각 밖에서 더 깊이 흐르며 급한 물살 아픈 몸짓 버렸습니다

당신 가슴 잔물결로 내게 오는 날은 그래도 그 강은 나의 강입니다

내 안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물길입니다 *

 

* 가을 꽃 가을 나비 - 함민복 

너무도 오래 당신을 찾아 날고 날았지요

 

견디고 견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꽃이 되고 말았네요

 

모든 게 깊어진 가을, 하오나

 

하직하면 저승의 봄잔치 푸르겠지요 *

 

* 가을 햇볕 - 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하다.

* 가을에 읽는 시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 가을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 저 가을 속으로 - 박정만  

사랑한다,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같은 울음을 이어 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가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속으로.

 

* 가을 물소리 - 김현영

내가 죽으면
이 가을 물소리 들을 수 있을까.
피 맞은 혈관의 피와도 같이
골짜기 스미는 가을 물소리.

하늘 저물면 물로 접어서
동해로든 서해로든 흘려보내
이 몸의 피 다 마를 때까지
바위에 앉아 쉬어 볼거나.

이 몸의 피 다 말라서
그냥 이대로 물소리같이
골짜기 골짜기 스며 볼거나
가을 물소리로 스며 볼거나. *

 

* 가을 손 -서시 - 이상범(李相範)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

 

* 가을나무의 말 - 김명리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엎어지는
저 또한 못 믿겠는 사람 심사를
목마른 가을나무들이 맨 먼저
눈치 채지 않겠는가

 

* 가을 문안 - 김종해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

 

* 가을날 - 민영  
고추잠자리가 날아간다

구름 사이로 열린

새파란 하늘을 향해

온몸이 달아오른 고추잠자리가

유리빛 날개를 파닥거리며

쏜살같이 날아간다

허공에 비친 깊은 호수가

하느님의 눈동자라도 되는 양.

 

*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 한기팔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 가을 잠 - 김남조 

네 이름에 이어진 건

여기 잠들어라

가을의 가슴 안에 쉬어라

 

죽을 뻔 죽을 뻔

쯤이나 하다가

얼마 헐거워진 너를 풀어 뉘이련다

자거라 자거라,

잠의 노래 부르리라


가을이 이렇게 큰 몸인 줄

내 몰랐어라

온 누리 복되고 위안인 줄

내 몰랐어라


네 마음에 이어진 건

모두 잠들어라

어머니의 품이니 쉬어라

아흔 아홉 가파른 고개

너를 등에 지고 온

여읜 빈 지게 비스듬히 세워두고

나도 잠들어 쉬련다

쉬련다

 

사랑이여

 

* 가을 별자리 - 육근상

단풍나무는 벌겋게 취해 흥청거리고
손가락 닮은 이파리들이 오를 대로 올라
색(色)기 부리고 있네

살짝 일렁이는 물바람에
목젖 다 드러내며 자지러지는 딸아이
봉숭아빛 입술 뜨거워지고 종아리 굵어졌으니
품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

겨울나려면 좀 더 비워둬야지
노을빛 눈부시게 부서지며 낡은 흙집 감싸 쥐면
뜨겁던 여름도 까맣게 익은 산초 씨로 떨어지는가

돌아가리라
삭정이 같은 노모 시래깃국 끓이고
삶이 무성했던 아버지도 허리 굽어
텃밭에 쌓인 고춧대 태우며 붉어지고 있을 것이니
돌아가 북창 열고 가을 별자리 하나 마련하여
안부 들어보리라

 

* 가을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 이인구

구름 몇 점
입에 문 채로
푸른 하늘 등에 업고
바람처럼 시들거나
구겨지지 않는
노래 부르며//
숲의 문 차례로 열어젖히고
끝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마음의 어둠
검은 밤처럼 던져 버리고//
우수수
쏟아질 듯 열린
하늘벌 가득한 별들을
한 낫에 추수하여
아무도 갖지 못한
한 재산 일구어내는

 

* 가을날에 - 조태일

아,

저,

아스라히 멀어서

눈에 잘 들고

몸에 잘도 감기는

하늘 끝자락

치렁치렁 두르셨다.

 

뙤약볕이 뙤약볕을 볶아 먹던

지난 여름을 만가로 잠재우시고

 

잔가지 많이도 거느린

덕 많은 소나무,

바알갛게 익어가는 감들을 어루만지며

바람, 바람, 바람, 다독이며

서성입니다.

 

묵밭뙈기 풀내음으로

컬컬한 목 축이시며. *

* 조태일시집[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창비


* 가을 - 기욤 아폴리네르

안개 속을 간다 다리가 구부정한 농부와

황소 한 마리, 가난하고 부끄러운

오막살이 감추는 안개 속을 느릿느릿.

 

저쪽으로 가면서 농부는 노래한다.

반지와 상처입은 가슴의

사랑과 부정(不貞)의 노래를.

 

오 !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도다.

안개 속을 간다 두 개의 쟂빛 그림자. *

 

* 추사(秋思) - 장적(張籍)[당]
洛陽城裏見秋風

欲作家書意萬重

復恐悤悤說不盡

行人臨發又開封

-가을 생각 
가을바람에 마음 놀란 나그네

아득히 처자를 그려 편지를 쓴다

아무래도 못다 한 사연 있는 것 같아

길을 떠나려다 봉(封)을 뜯어 다시 읽는다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 시 모음  (0) 2013.11.04
낙엽 시 모음  (0) 2013.10.24
시인(詩人) 시 모음  (0) 2013.10.07
소나기 시 모음  (0) 2013.09.13
모란 시 모음  (0) 201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