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기 -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 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운우)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 나가고 싶다. *
* 소나기 - 장석남
남천(南天)에서
천둥소리 하늘을 깨치는가 싶더니
머위밭을 한꺼번에 훑는
무수한 초조함들
처럼
이제 어디에라도
닿을 때가 되었는데
되었는데
소나기 지나가며
외딴 어느 집 처마 밑에 품어 준
열서넛 남짓
나일론 옷 다 젖어 좁은 등허리 뼈 비쳐 나는
소년, 처연한 머리카락
서 있는 곳
그 토란잎 같은 눈빛이 가 닿는 데
그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가는 데
그런 데에 닿을 때 되었는데,.....,
천둥이 하늘을 깨쳐 보여 준 그곳들을
영혼이라고 하면 안 되나
가깝고 가까워라
그 먼 곳
이 땅에 팍팍
이마를 두드리다 이내
제 흔적 거두어
돌아간
오후 한때
소나기 행자(行者)들
쫓아간
내 영혼
겨울 어느 날
눈 오시는 날
다시 보리라
빈 대궁들과 함께 서서
구경꾼처럼
구경꾼처럼
눈에 담으리라 *
* 장석남시집[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지
* 소나기 -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
* 소나기 - 나희덕
노인도 아기도 벌거벗었다
빗줄기만 걸쳐 입은 노인의 다리가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늘어진 성기, 주름진 사타구니 아래로
비는 힘없이 흘러내리고
오래 젖을 빨지 못한 아기의 눈이
흙비에 젖어 있다
옥수수가 익으려면 아직 멀었다
연길 들판, 소나기 속으로
늙은 자연이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오후 *
* 소나기 - 이의리
소나기가
한바탕
쓸고간 자리
나무들을
말끔히
목욕 시키고
하늘은
높이
밀어 올리고
먼 산을
내 앞에
옮겨 놓았다.
* 8月 소나기 - 김명배
더럭더럭 운다,
8月 소나기.
늙은 부처가 낮잠을 깬다.
숲속 어디에
빤짝이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다.
* 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 나뭇잎을 닦다 - 정호승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
* 유월 소낙비 - 박성우
청개구리가 울음주머니에서
청매실을 왁다글왁다글 쏟아낸다
청개구리 울음주머니에서
닥다글닥다글 굴러 나오는 청 매실
소낙비가 왁다글왁다글
닥다글닥다글 왁다글닥다글 자루에 담아간다 *
* 소나기 - 박찬덕
소나기 발 빠르게 골목을 지나간다
나줏손* 푸른 꿈 빗방울 속에 피어나니
기려한** 노랫소리가 들풀보다 무성하다 *
*나줏손 : 저녁 무렵
**기려하다 : 뛰어나게 아름답고 화려하다. 곱고 아름답다.
* 뇌우(雷雨) - 오세영
모락모락 구름 속에 풀무질이 요란하다.
대장간 망치 소리 벌겋게 단 시우쇠
찬물에 담금질 끝나자 하늘 고운 무지개. *
* 취우(驟雨) - 화악(華岳)[송]
牛尾烏雲潑濃墨 - 우미오운발농묵 牛頭風雨飜車軸 - 우두풍우번거축
怒濤頃刻卷沙灘 - 노도경각권사탄 十萬軍聲吼鳴瀑 - 십만군성후명폭
牧童家住溪西曲 - 목동가주계서곡 侵早騎牛牧溪北 - 침조기우목계북
慌忙冒雨急渡溪 - 황망모우급도계 雨勢驟晴山又綠 - 우세취청산우록
-소나기쇠꼬리에 검은 구름 먹물 뿌린 듯하더니
쇠머리에 비바람 물레방아 물 쏟아 붓듯 하네
사나운 물결 이내 백사장을 휘마는데
십만 군사 함성이요 우렁우렁 폭포 소리
개울 서쪽 모퉁이에 사는 목동이
이른 아침 소를 타고 개울 북쪽에서 풀을 뜯기다가
황망히 비 무릅쓰고 시내를 건너는데
비 싸악 멎고 날씨 활짝 개이니 산 다시 파아랗네 *
* 이병한엮음[땅 쓸고 꽃잎 떨어지기를 기다리노라]-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