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슬픔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 모란꽃 그림 - 고영민
모란꽃 그림이 걸려있는 옛집에 와 눕네
잠은 오는데, 잠은 안 오고
그만 자자
안방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그만 자자
모란꽃 큰 잠속으로
날 데려가던,
발끝까지 눈꺼풀을 사르르 내려주던
그 낮고 푹신한
이젠 만나 볼을 부빌 수 없는 겹잎의
그 곳, 그 시간
모든 것들의 저녁
그만 자자
뱉은 침을 얼굴에 맞고
오늘은 누가 목소리 없는 이 방에
큰 모란꽃의
목소리를 줄 것인가 *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 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 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 세상이 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어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 속에 괴어 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 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血肉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ㅡ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의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또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새를 사 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두 양주가 그 새고길 저녁상에서 먹어 消化하고,
이어 한 영兒를 낳아 養育하고 있기에,
뜰에 내린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또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現生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번 마주 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
*서정주시집[안 끝나는 노래]-정음사
* 모란 - 오세영
완벽한 아름다움이어서 아름다움이
아닌 꽃.
차라리
톡 쏘는 향기로 엘러지를 일으킨다면,
날카로운 가시로 상차를 입힌다면,
요염한 색깔로 잠든 관능을 깨친다면,
뒤틀린 꽃잎으로 게으른 시선을 빼앗는다면,
....................................
미스 코리아가 결코
인기 탈렌트가 되지 못하듯
너무 완벽한 아름다움이어서 다만
멀리 두고
바라만 보는 꽃이여. *
* 모란꽃 무늬 화병 - 나호열
한 겨울
낟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잠든 두루미처럼
하얗고 목이 긴
화병이 내게 있네
영혼이 맑으면 이 생에서
저 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나
온갖 꽃들 들여다 놓아도
화병만큼 빛나지 않네
빛의 향기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문 반의 발자국 소리
바라보다 바라보다 눈을 감네
헛된 눈길에 금이 갈까 봐
잠에서 깨어 하늘로 멀리 날아갈까 봐
저만큼 있네
옛사랑도 그러했었네
* 목단여정(牧丹餘情) - 박목월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
수정 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
* 모란의 연(緣) - 류시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
* 모란 - 송기원
그럴 줄 알았다
단 한번의 간통으로
하르르, 황홀하게
무너져내릴 줄 알았다.
나도 없이
화냥년! *
* 모란 - 이정하
얘야, 지금 흘리고 있는 너의 눈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란다.
진정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 없이는
눈물은 결코 고이지 않기 때문이지.
* 모란꽃 이우는 날 - 유치환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이
뒷산 솔밭을 묻고 넘쳐오는 안개
모란꽃 뚝뚝 떨어지는 우리 집 뜨락까지 내려,
설령 당신이 이제
우산을 접으며 방긋 웃고 사립을 들어서기로
내 그리 마음 설레이지 않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기다림에 이렇듯 버릇 되어 살므로
그리하여 예사로운 이웃처럼 둘이 앉아
시절 이야기 같은 것
예사로이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내 안에 당신과 곁하여 살므로
모란은 뚝뚝 정녕 두견처럼 울며 떨어지고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이제 하마 사립을 들어오는 옷자락이 보인다
* 목단꽃 이불 - 박성우
산골짝 오월 밭뙈기가
빨강 분홍 목단꽃 이불을 덮고 있다
가만 들여다볼수록
어쩐지 촌스럽기 짝이 없어
아슴아슴 예쁜 목단꽃, 벙글벙글하다
엄니 아부지도 촌스럽게
저 목단꽃 이불 뒤집어쓰고
발가락에 힘을 줘가며 끙끙 피어났겠지
큰누나 큰성도 함박, 누이들도 나도 막내도 함박
시큼시큼 피워냈을 생각하면
목단꽃을 한낱 촌스럽기 짝이 없는 꽃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되겠구나, 생각하다가
목단꽃은 어째 더 촌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어쩐지 더 더 더 촌스럽기 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목단꽃 이불을 바짝 당겨보는 것인데
뻔한 세간 옮길 때마다 꾸려지던
목단꽃 이불은 언제 사라진 걸까
가까운 오래전 명절 밤,
목단꽃 이불을 코끝까지 당긴 나는
툭 불거져나온 발의 개수를 가만가만 세어본다
* 飮酒看牧丹 - 劉禹錫(유우석)
今日花前飮 - 오늘은 꽃 앞에서 술을 마시다보니
甘心醉數杯 - 기분 좋아 몇 잔 술에 취해버렸네
但愁花有語 -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꽃이 말 할 수 있다면
不爲老人開 - 늙은 그대 위해 핀 건 아니라면 어쩌나 *
* 모란을 읊은 시 - 피일휴(皮日休)
殘紅落盡如吐芳 - 봄의 잔홍(殘紅)이 지고 난 다음에 꽃을 피우니
佳名喚爲百花王 - 아름다운 그 이름은 백화왕이라
競誇天下無雙艶 - 천하무쌍의 아름다움을 서로 다투어서
獨占人間第一香 - 이 세상에 으뜸가는 향기를 홀로 차지하였네 *
* 牧丹 - 이정봉(李正封)
國色朝酣酒 - 나라에서 으뜸 미인의 얼굴엔 아침에도 술기운이 돌고
天香夜染衣 - 천계의 맑은 향기가 밤에 옷에 스며드네
丹景春醉容 - 단경의 봄은 취한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明月問歸期 - 밝은 달은 돌아갈 기약을 묻누나
* 牧丹 - 이응희(李應禧)
牧皇臨玉砌 - 꽃의 왕이 옥섬돌에 섰으니
衆卉北面依 - 뭇 꽃들이 공경히 우러른다
翠袖飜風艶 - 푸른 소매는 바람에 곱게 나부끼고
紅袍映日輝 - 붉은 옷은 햇살에 어려 빛나네
蝶使來相望 - 나비 사신이 줄을 이어서 오고
蜂王會且歸 - 벌의 왕은 모였다가 돌아가네
尊居無一事 - 존귀한 자리 앉아 아무 일 없으니
頗有不成譏 - 이룬 일 없다는 비난을 자못 받누나
* 모란 - 박수근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