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인연 시 모음

효림♡ 2013. 7. 30. 21:24

* 인연 - 정채봉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없어진 것도 아닌

행복한 것도 아닌

너와 나는 다시 약속한다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

 

* 인연 - 장석남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하관(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인연 - 복효근 
저 강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흘러간다고도 하고 하늘로 간다고도 하지만
시방 듣는 이 물소리는 무엇인가
흘러간다면
저기 아직 먹이 잡는 새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은빛 배를 뒤채는 저 물고기들은
또 어디로 흘러간 물의 노래인가
공이라 부를 건가
색이라 부를 건가
물은 거기 서서 가지 않고 흐르는데
내 마음속으로도 흐르는데
저 나무와 새와 나와는 또 어디에 흘러
있는 것인가 *

* 복효근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

 

* 인연 -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 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 꽃잎 인연 - 도종환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인연 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의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못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가는 일이다

 

* 인연설 - 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어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 원망치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 인연설 - 함동선
경주 천마총의
구름 밟고 달리는 천마도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어느 말사(末寺)에 머물었다
바람이 없는데도
도량엔 낙엽이 쌓인다
낙엽은 떨어지는 소리도 없으니
지난 여름의 영화를 돌아보는 나처럼
가볍기만 하다
아니 몸의 무게뿐만 아니라 욕심까지 놓아버린 것 같다
동승이
누가 밟기 전에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비질을 할 때마다 나비가 날아오고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쓸어내도 쓸어내도 따스한 추억은
비질을 한 자리를 덮고 또 덮는다
그건 살아오는 동안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인연이다

 

* 인연 -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 박남준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
* 박남준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 인연 - 유자효

좋은 시절을 만나

좋은 세상에 났으니

조상의 은덕인 줄을 알겠다

 

좋은 가문에 나서

좋은 공부를 했으니

전생에 좋은 일을 했음을 알겠다

 

내가 하는 일들이

후손의, 후생의 일을

결정하는 것인 줄 이제 알겠다 *

* 유자효시집[주머니 속의 여자]-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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