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음식 시 모음 4

효림♡ 2013. 8. 23. 08:40

* 메밀냉면 - 장옥관

겨울을 먹는 일이다

한여름에 한겨울을 불러 와 막무가내 날뛰는 더위를 주저 앉히는 일

팔팔 끓인 고기국물에 얼음 띄워

입 안 얼얼한 겨자를 곁들이는 일

 

실은 겨울에 여름을 먹는 일이다

창 밖에 흰눈이 펄펄 날리는 날 절절 끓는 온돌방에 앉아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니 이야말로

겨울이 여름을 먹는 일

 

겨울과 여름 바뀌고 또 바뀐

아득한 시간에서 묵은 맛은 탄생하느니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깊은 샘에서 솟아난 담담하고 슴슴한 이 맛

핏물 걸러낸 곰국처럼 눈 맑은 메밀 맛.

 

그래서일까 내 단골집 안면옥은

노른자위 도심에 동굴 파고 해마다 겨울잠 드는데

풍속 바뀌어 겨울잠 자는 게 아니라

냉면은 메밀이 아니라 간장독 속 검고도 깊은 빛깔처럼

그윽한 시간으로 빚는 거라는 뜻 아닐는지. *

 

* 수제비 - 이재무

한숨과 눈물로 간 맞춘

수제비 어찌나 칼칼, 얼얼한지

한 숟갈 퍼올릴 때마다

이마에 콧잔등에 송송 돋던 땀

한 양푼 비우고 난 뒤

옷섶 열어 설렁설렁 바람 들이면

몸도 마음도 산그늘처럼

서늘히 개운해지던 것을

 

살비듬 같은 진눈깨비 흩뿌려

까닭 없이 울컥, 옛날이 간절해지면

처마 낮은 집 찾아들어가 마주하는,

뽀얀 김 속 낮달처럼 우련한 얼굴

구시렁구시렁 들려오는

그날의 지청구에 장단 맞춰

야들야들 쫄깃하고 부드러운 살(肉)

훌쩍훌쩍 삼키며 목메는 얼큰한 사랑. *

 

* 찐빵 - 박형준

겨울에 도시로 전학 와 새 학교 갔다

처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이 오도록 집을 못 찾고

비슷비슷한 골목을 헤매다녔다

시골집에서는 저녁때가 되면

무쇠솥을 들썩이는 밥물의 김처럼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으로

동네 어디에서 놀고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의 힘으로 집에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며,

찐빵집 앞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녁 찐빵집 앞을 지나가다 보면 그때처럼
추억의 온도로 부연 찐빵의 김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어진다
팥소 가득한 찐빵을 뜨겁게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하얀 김 속에서 그렇게,
집에 가다 말고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

 

* 김밥 - 이병률

어느 날의 김밥은

굴리고 굴려서 힘이 된다

굴리고 굴려서 기쁨이 된다

 

잘라진 나무의 토막처럼 멋진 날이 된다

 

김밥은 단면을 먹는 것

둥그런 마음을 먹는 것

그안의 꽃을 파먹는것

 

아픈 날이면 어떤가

안 좋은 날이면 어떤가

김에서는 바람의 냄새

단무지에선 어제의 냄새

밥에서는 살 냄새

당근에선 땅의 냄새

 

아이야

혼자 먹으려고 김밥을 싸는 이 없듯이

사랑하는 날에는 김밥을 싸야 한단다 

                           

아이야

모든 것을 곱게 펴서 말아서 굴리게 되면

좋은 날은 온단다 *

 

* 과메기 - 문인수 

겨울 한철 반쯤 말린 꽁치를 아시는지.

덕장 해풍 아래, 그 등 푸른 파도소리 위에

밤/낮 없이 빽빽하게 널어놓고

얼렸다 풀렸다 얼렸다 풀렸다  한 것이니 그래,

익힌 것도 날 것도 아니지. 다만

고단백의 참 찰진 맛에

아무래도 먼 봄 비린내가 살짝 비치나니.

 

저 해와 달의 요리, 이것이 과메기다. 친구여,

또 한 잔!

이 우정 또한 천혜의 사철 술안주라지 *

 
* 산낙지 - 정호승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 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

 

* 감자떡 - 맹문재

내 손을 잡은 큰고모님은

말갛게 웃으신다

 

들일과 땔감 나무를 하느라 손이 거칠고

자식들 걱정에 머리가 세었지만

장조카를 바라보는 눈길은

윤기가 난다

 

상처나거나 상한 감자들이

물 담긴 독에 담겨 썩는동안 내는

고약한 구린내

 

물을 갈아주고 또 갈아주는 손길에

구린내는 사라지고 남는

햇살 같은 녹말가루

 

그리하여 감자떡은

상처도 슬픔도 냄새도 감쪽같이 지운

말간 얼굴이다

 

할머니를 닮은 큰고모님이

눈밭에 서 있는 내게 감자떡을 내민다 *

 

* 선지해장국 - 신달자

한 사내가 근질근질한 등을 숙이고 걸어갑니다
새벽까지 마신 소주가 아직 온몸에 절망을 풍기는
저 사내
욕을 퍼마시고 세상의 원망을 퍼마시고
마누라와 자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마시다가
누구를 향해 화를 내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잔
드디어 자신의 꿈도 씹지도 못한 채 꿀꺽 넘겨버린
저 사내
으슥으슥 얼음이 박힌 바람이 몰아치는 청진동 길을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걸어가다가
바람처럼 '선지 해장국'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야릇한 미소를 문지르며 진한 희망 냄새 나는
뜨거운 해장국 한 그릇을 받아 드는데
소의 피, 선지 한 숟가락을 물컹하게 입 안으로
우거지 한 숟가락을 들판같이 벌린 입 안으로
속풀이 해장국을 한 번에 후루룩 꿀꺽 마셔버리는데
그 사내 얼굴빛 한번 시원하게 불그레합니다
구겨진 가난도 깡소주의 뒤틀림도 다 사라지고
속 터지는 외로움도 잠시 풀리는데
아이구 그 선지국 한 그릇 참 극락 밥이네
어디서 술로 밤을 지새운 것일까 구석진 자리
울음 꽉 깨무는 한 여자도
마지막 국물을 목을 뒤로 젖힌 채 마시다가
마른 눈물을 다시 한 번 문지르는데
쓰린 가슴에 곪은 사연들이 술술 사라지는데
여자는 빈 해장국 오지그릇을
부처인 듯 두 손 모으고 해장국 수행 끝을
희디흰 미소로 마무리를 하는데.....*

 

* 꼬막조개 - 김용택  

동네 사람들은

재첩을 꼬막조개라고 불렀다.
커다란 바위 뒤 물속
잔자갈들 속에서 살았다.
아이들 엄지손톱만 한 것부터
아버지 엄지손톱만 한 것까지 있었다.

어쩌다가 다슬기 속에 꼬막조개가 있으면
건져 마당에다가 던져 버렸다.
꼬막조개가 있으면 다슬기 국물이 파랗지 않고
뽀얀했다.

강에 큰물이 불면
꼬막 조개껍질이
둥둥 떠내려갔다.

어느 해부턴가
꼬막조개가 앞강에서 사라졌다.
어른이 되어 하동에 갔더니
온통 재첩국 집이었다.
나는 재첩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우리 동네에서 사라진
꼬막조개가 하동에서
재첩이 되어 있었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 개두릅나물 - 장석남

개두릅나물을 데쳐서

활짝 뛰쳐나온 연둣빛을

서너 해 묵은 된장에 적셔 먹노라니

새 장가를 들어서

새 먹기와집 바깥채를

세내어 얻어 들어가

삐걱이는 문소리나 조심하며

사는 듯하여라

앞 산 모아 숨쉬며

사는 듯하여라 *

 

*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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