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 김용택
배 고플 때 지던 짐 배 부르니 못 지겠네 *
* 시인 1 - 함민복
새조롱 속에 새 울음소리 고여 있지 않다네
울음소리 조롱을 흘러넘쳐
햇살에
젖은 길 나고
새는 날개의 길을
울음소리로 가 본다네
그렇게 한 生을 이울이면
눈동자가 염전이 될 수 있을까
태양을 흘러넘친 햇살이여
라일락꽃 향기가 되어 흩날리는 *
* 시인 - 이종문
알고 보니 시인이란 게 개코도 아니더군
시인 김선굉이 찔레밭에 엎어져서
가시가 온통 박혀 고슴도치 되었는데
시인 서너 명이 다 달라붙어봐도
조그만 가시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네
아 글쎄, 시인이란 게 바늘 하나만도 못해 *
* 시인 - 최영철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매미는
제 외로움을 온 천하에 외치고 다녔네
해 밝으면 금방 날아갈 슬픔
비는 너무 많은 눈물로 뿌리고 다녔네
아무 데나 짖어대는 저 개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그렇게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그 바람에 새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지나쳐 왔네
저녁이 오기도 전 바위는
서둘러 제 몸을 닫아버렸네
잡았던 손길 뿌리치고 물은 아래로
저 아래로 한정 없이 흘러가고 있네
천둥의 잘못은 너무 큰 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은 것
시인의 잘못은 제 가난을 밑천으로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른 것. *
* 시인 - 김남주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
* 시인(詩人) -김동리
온갖 것 생각하고 느낌에 겨운 이
시인 아닌 사람 있을까
죽음에 눈물 짓고
삶을 다시 가다듬는, 그리고
아아 부드러운 눈길 스칠 때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이 있을까
파초잎을 두들기는 한밤의 빗소리
사랑은 멀리 두고 저녁녘의 함박눈
이를 모두 그 누가 시 아니라 하느뇨
말을 꼬부려 얽어 내는 마음의 무늬
이는 더욱 다듬어진 시
그러나 이 보다 우주(宇宙)를 고아 내는
그러한 참된 시는 흔치 않으리
* 시인 선서 -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詩이며, 거짓말 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盟友여야 한다.
* 시인 - 나태주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
살아가는 사람
한 번이 아니라
연거푸 여러 번
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
생애를 두고
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
죽어가는 사람, 시인. *
* 시인 - 최승자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켰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그리고 잘못 삼켰다.
이 피곤한 컹컹거림을 멈추게 해다오.
이 대열에서 벗어나게 해다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그리고 폐광처럼 깊은 잠을
꾸고 싶다.
* 시인 - 정호승
혹한이 몰아닥친 겨울아침에 보았다
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가
출입문 앞에 내어놓은 고무함지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미꾸라지들
결빙이 되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죽은 모습을
꼬리지느러미를 흔들고 허리를 구부리며
길게 수염이 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채
기역자로 혹은 이응자로 문자를 이루어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
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
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
시인들을 *
* 시인 - 안도현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며본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내 안의 시인 - 도종환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줄 몰라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빚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를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 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듯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놓은 것일까 *
-1행, 18~19행은 S.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한 것임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 김종삼시집[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
* 베스트셀러 시인 - 노향림
'나무의 수사학'을 펴낸 손택수 시인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젊은 시인상을 받을 때
밝힌 수상 소감이다.
시집이 나오고 일주일 동안 책이 하도 잘 나가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는 꿈을 꾸었단다.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가짜였다고,
어머니가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한 권 한 권
사다가 쌀독 속에 쌓아 두었던 것.
가끔 노친네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는데
시집 외상, 5000원
시집 외상, 8000원
어머니 글씨가 선명했고 시인이 시인 자신의 시집을
사는 것 같아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한다.
그 뒤 한 달을 기다렸다가 서점에 들러 보니
딱 한 권 팔렸다고.
그 말을 들은 시인은 처음엔 실망했지만
그 한 권을 사간 사람은 혹시 시인일지 모른다고
그 한 권을 산 독자를 위해 계속 쓰겠노라 했다.
시인은 시밖에 몰라서 늘 목말라해도
투명한 영혼의 젖줄은 계속 풀어내야 한다고.
독자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 위해 쓰는
오, 진정한 베스트셀러 시인.
* 시인(詩人) -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명등(明燈)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옥(玉)과 같은
진정한 시인(詩人)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정숙(靜菽)에
첫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 긴 손가락의 詩 -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
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
* 시인들 - 이병률
1. 나이 먹어서도 사람을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 잔 오가며
-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 이병률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