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햇빛 시 모음

효림♡ 2014. 7. 1. 14:08

* 햇살에게 - 정호승 

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섬진강에서 - 장석남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

 

저만치 바람에

들菊 그늘이 시큰대고

무릎이 시큰대고

적산가옥

청춘의 주소 위를 할퀴며

흙탕물의 구름이 지나간다

 

아,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 *

 

* 허락된 과식 -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

 

* 창살에 햇살이 - 김남주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 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 햇살의 분별력 - 안도현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 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

 

*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 이정록 
눈도 녹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양달을 잘 아시는가
나물을 뜯으려고 바구니를 내려놓은 자리
거기다, 그곳이 햇살의 곳간이다
갈퀴 손으로 새순을 어루만지자
오물거리던 햇살이 재게 할머니의 등에 오른다
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리자
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
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
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
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
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
항아리 숫돌에 녹물을 지운 나물 칼
응달은 자신의 남은 빛을 그 칼날에다 부려놓고
방금 새순을 바친 풀뿌리로 스며든다
우글거리던 햇살의 도가니, 그 밑자리로
응달은 겨울잠 자러 가는 실뱀처럼 꼬리를 감춘다
양달은 지금 어디에다 아랫목을 들였나
아기가 갑자기 제 트림에 놀라 운다
아기의 뱃속 어딘가에서
빙벽 하나 무너져내렸는가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할머니의 봄날 - 장철문    
볕 아깝다
아이고야 고마운 이 볕 아깝다 하시던
말씀 이제사 조금은 알겠네
그 귀영탱이나마 조금은 엿보겠네
없는 가을고추도 내다 널고 싶어하시고
오줌장군 이고 가
밭 가생이 호박 몇구덩이 묻으시고
고랫재 이고 가
정구지 밭에 뿌리시고
그예는
마당에 노는 닭들 몰아 가두시고
문이란 문은 다 열고
먹감나무 장롱도
오동나무 반닫이도 다 열어젖히시고
옷이란 옷은 마루에
나무널에 뽕나무 가지에 즐비하게 내다 너시고
묵은 빨래 처덕처덕 치대
빨랫줄에 너시고
그예는
가마솥에 물 절절 끓여
코흘리개 손주놈들 쥐어박으며 끌어다가
까마귀가 아재, 아재! 하고 덤빈다고
시커먼 손등 탁탁 때려가며
비트는 등짝 퍽퍽 쳐대며
겨드랑이 민둥머리 사타구니 옆구리 쇠때 다 벗기시고
저물녘 쇠죽솥에 불 넣으시던 당신
당신의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렸네
당신 산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기슭에는
가을에 흘린 비닐 쪼가리들 지줏대들 태우는 연기 길게 오르고
이따금 괭잇날에 돌멩이 부딪는 소리 들리겠네
당신의 아까운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려 저 혼자 마르고 있네 *

* 장철문시집[산벚나무의 저녁]-창비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 겨울햇빛에 대하여 - 고은 
겨울햇빛 너는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가만가만
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
겨울햇빛 너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
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
조금 어루만지고 간다
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
겨울햇빛 너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간다
지식이 무식보다 얼마나 유죄인가
정녕 그렇겠다
겨울햇빛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얼간이들이
한동안 싸우지 않고
한동안 피 흘리지 않을 어느 날을 꿈꾸고 온
겨울햇빛 너는
나를 지우지 않고 우선 내 그림자를 지우고 간다
통곡인들
오열인들
내 절규인들 들어주는 곳 전혀 없다
겨울햇빛 내가 간 뒤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다 

 

* 햇빛 속에 호랑이 - 최정례
나는 지금 두 손 들고 서 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머리가 지글거리고 돌밭이 지글거리고, 호랑이 눈깔 타들어가다 못해 슬몃 뒤돌아 가버렸던 거라, 그래 전재산이었던 엇송아지를 지켰고, 할머니 눈물 돌밭에 굴러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다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식의 호랑이를 만난 것이라

신호등을 아무리 노려봐도 꽉 막혀서


ㅡ 다리 한 짝 떼어놓으시지

ㅡ 팔도 한 짝 떼어놓으시지


이젠 없다 없다 없다는데도

나는 증조할머니가 아니라 해도


ㅡ 머리통 염통 콩팥 다 내놓으시지

ㅡ 내장도 마저 꺼내 놓으시지


저 햇빛 사나와 햇빛 속에 우글우글

아이구 저 호랑이 새끼들 *

* 최정례시집[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 햇빛의 선물 -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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