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포(瀑布) - 김수영(金洙映)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두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 김수영시선[거대한 뿌리]-민음사
*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폭포 - 신달자
오직
외길
세상은 잠시 물러가고
기꺼이 파멸을 향해 뛰어내리는
저 현란한 투신
한번쯤 만나고 싶었던
가슴 뛰는 영웅들을 여기서 본다
항복이 아니다
부서질 수밖에 없는
종착 지점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찰나의 대결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의 팽팽한 결의를 뒤따르는
숨은 영웅들의
격렬한 순열을 여기서 본다 *
* 신달자시집[오래 말하는 사이]-민음사
* 직소폭포 - 김선태
얼마나 오래도록 탁한 생각을 흘려버려야
직소폭포, 저 차고 깨끗한 물빛이 되는가
얼마나 많은 주저와 두려움을 베어버려야
직소폭포, 저 꼿꼿한 풍경으로 설 수 있는가
얼마나 숱한 울음을 안으로 눌러 죽여야
직소폭포, 저 시원한 소리의 그늘을 드리우는가
그래, 저러히 높고, 크고, 깊게 걸리는 폭포로서만이
내변산 첩첩산중을 두루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것이리 *
* 폭포 앞에서 - 정호승
아래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
* 불일폭포 - 정호승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내가 물방울이 되어 부서집니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갑자기 물소리가 그치고
무지개가 어립니다
무지개 위에
소년부처님 홀로 앉아
웃으십니다 *
* 불일폭포 - 정호승
떨어져 죽어야 사는 것이다
물보라를 이루며 산산조각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져 죽어야
사는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울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뒤돌아보지는
어머니를 부르지는
더더욱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저 푸른 소에 힘차게 뛰어내려 죽지 않으면
저 검푸른 용소에 휩싸여
한 천년 부대끼며 함께 살지 않으면
흐를 수 없는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살 수 없는 것이다
산과 들을 버리고
밑바닥이 되어 멀리 흘러가지 않으면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새롭게
살 수 없는 것이다 *
* 정호승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 폭포 - 복효근
직하(直下)*라커니
곧은 소리*라커니 하지만
물줄기는 주춤대다 망설이다
휘어져 떨어지기도 한다
지사형의 수직도 좋지만
나는 저 인간적인 휘어짐이 좋다
큰 줄기 곁에는
작은 줄기들의 작은 소리들
불평하듯 탓하고 욕하듯
중얼거리듯 한탄하듯 흥얼거기듯
소(沼)에 떨어지기도 전에
물방울로 흩어져 어지러운
어지러운 소리들이
무지개를 걸어놓기도 한다
두려움에 떨며
떨다가 질끈 눈 감고 뛰어내리는
저 작은 물줄기들의 투신에
폭포는 비로소 장엄 폭포가 된다 *
*이백[망여산폭포]
**김수영[폭포]
* 구성폭포(九聲瀑布) - 임동확
이루지 못한 것들이 내는 소리가
어찌 아홉 가지뿐이겠는가
눈 쌓인 계곡 얼음장 속에서도
연신 목숨처럼 이어져 흘러내린 슬픔들이
이제야 한껏 소리 내어 울어보기라도 하듯
그만 넋을 놓아버린 그 자리
수직의 절벽마다 흰 거품이 상사뱀처럼 엉겨붙는다
그나마 잊혀지기 않기 위해 한켠의 돌탑으로 똬리를 틀거나
흔적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세월들을 기억하며
다시는 거슬러가거나 반복할 수 없는 것들이
저를 부르는 적막 속으로 망명도생(亡明圖生)하고 있다
오로지 단 한 번의 순간만 있는,
그러기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나누거나 가늠해볼 수 없는 것들이
그 어디 아홉 가지뿐이겠냐며
그때마다 겨울 폭포는 가둘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듯
더울 깊어진 제 안의 물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잠시나마 붙잡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살아 솟구쳐 오르다가 더러 얼음기둥이 되어, *
* 구성폭포-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 계곡에 있는 폭포.
* 임동확시집[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실천문학사
* 폭포 - 손택수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 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자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 손택수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 폭포 - 오세영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
* 직소폭포 - 안도현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은 게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소 채찍을 허공으로 치켜드는 순간, 채찍 끝에 닿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적어도 구천 마리의 말이 푸른 비명을 내지르며 폭포 아래로 몰려올 것 같소
그중 제일 앞선 한 마리 말의 등에 올라타면 팔천구백구십구 마리 말의 갈기가 곤두서고, 허벅지에 핏줄이 불거지고, 엉덩이 근육이 꿈틀거리고,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뒷발을 박차며 말들은 상승할 것이오 나는 그들을 몰고 내변산 골짜기를 폭우처럼 자욱하게 빠져나가는 중이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 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
* 직소폭포 - 송종찬
그대를 떠나 객지를 떠돈 지 십수 년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 잘 드는 조선낫이 되었던 걸까. 푸른 억새 낫처럼 마음을 베고 홍화 붉게 물들어 손금을 적시는 내변산 직소폭포를 오르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리 헐겁지 않았는데 그대 발부리는 장맛비를 머금고 야윈 등줄기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 그 옛날 나 그대 얼굴 바로 볼 수 없어 내소사 뒷길에 올라 갈밭머리를 건너오는 바람결에 마음을 빗질하곤 했었네.
누가 그대 가슴에 길을 냈는가. 어젯밤 장맛비 퍼부어 나 떠날 수 없게 하고 달을 건네주던 다리는 물에 잠겨 발목까지 차오르는 빗길, 찢긴 속곳처럼 불타 없어진 實相寺址 지나 물을 건너네. 그대 가까워질수록 엎드려 흐르는 목소리 들리고 맑은 눈 마주칠까 두려워 나 적송의 가지 뒤에 숨어 하늘만 보았네. 그때 옷고름 밖으로 쏟아지던 절규 그대는 그 가는 몸으로 이 땅의 욕망을 받아내고 있었네. *
*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실천시선200
* 구룡폭포(九龍瀑布) - 조운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剛)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룔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
* 박연폭포 - 이병기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궂지 아니하도다
* 직소폭포 1 - 송수권
흐린 세상 물이 너무 맑아 탈이다
맑은 물 속에 비로소 내가 보인다
그 동안 어디를 그리 헤메었느냐
며칠 전 바람처럼 휩쓸고 온
유럽 천지는 괜찮더냐
가도 가도 양파밭과 귀리밭과 밀밭뿐인
대평원의 초록에도 공황이 있고 공포가 있다니
지리한 하품과 권태가 있다니
초록의 심연에는 닿지 못하고 얼굴 없는 세상에
발이 먼저 가 닿는 망망대해
直沼는 直沼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게 탈이다
송사리떼가 다시 발을 간지른다
맑은 물 속에 비로소 내가 보인다
달이 뜨면 안심하고
저 월명암까지 비껴 오르리라.
* 송수권시집[격포에 오면 이별이 있다]-문학의 전당
* 직소폭포 2 - 송수권
흐린 세상 곧은 소리 묻힐까 싶어
밤에도 직립으로 서서 떨어지는 폭포
아니, 한밤중에도 우레소리로 퍼붓는 폭포
아직도 이 폭포 밑에선 물비늘 뒤집어쓴
반딧불 저희끼리 숨어 사는 동네가 있나 보다
맞은편 절벽 밑 풀숲을 높게 낮게 선회하며
현호색 밝은 선을 긋는 개똥벌레들,
개똥벌레야 개똥벌레야 자지 마라
이 곧은 소리 속에 묻혀 더 싱싱해진 네 몸의 빛
내 또한 이 물범벅 속에 묻혀 온 삭신이 저리는 밤
그래, 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
그래 그래, 우리 잠들지 말자꾸나. *
*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ㅡ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 천양희시집[직소포에 들다]-문학동네
*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 이백
日照香爐生紫煙 -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前川 - 요간폭포괘전천
飛流直下三千尺 -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 의시은하락구천
-여산폭포
향로봉에 햇살 비쳐 안개 붉게 피어나는데
폭포 바라보니 어허, 거기 냇물이 걸려 있네
비상할 듯 솟구치다 곧바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구만리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졌나? *
* 김용택의 한시 산책-화니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