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젊은 시 모음 5

효림♡ 2014. 8. 7. 09:00

*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變歌 1 - 한승원
초파일에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너를 위해 달았다
금산사 가는 산굽이 위에서
밤은 별들을 초롱같이 켜달았다
이 여름엔 나도 한 점 혼령이 될거나
눈 부릅뜨고 수묵화 같은 너의 숲을 헤매는
철 이른 반딧불이나 될거나.

 

* 찬 비 - 고운기 
느티나무가 아직은 밝다
용케 제 잎을 거느리고 있다
찬비가 떨어지기 시작한 아침이 조금은
마음 쓰인다
비야 스며들어
내 가슴에 이르러다오
잎을 다 내주고도
이 계절을 견뎌 축축하겠다

비와 더불어 바람이 불어오겠다 *
* 고운기시집[구름의 이동속도]-문예중앙,2012

 

* 정오 - 임동확
아스팔트 위의 고양이, 길가 풀섶의 앉은뱅이 망초, 냉장고 속의 마늘 싹들까지 가장 외롭고 높게 맑고 푸른, 그 어느 하나 빠트리지 않은 채 남김없이 빛나는 생의 정오

오로지 흠가지 않는 보석처럼 찬란한 눈망울을 마치 처음인양 깜박이며 다가오는 한 아이가 제 어미젖을 빨다 방긋 웃고 있고, 또 은어 새끼 한 마리가 제가 태어난 강을 떠나 막 바다로 향하고 있을 때

소리도, 형체도 없는 그 하늘이 그저 두려울 뿐 어찌 더 이상 무엇이 괴로우며 아쉬울 것인지요

논둑에서 긴 목을 빼고 있는 쇠백로 한 마리, 전나무를 기어오르는 칡덩굴, 비 개자마자 밤꽃을 탐하는 호박벌 한 마리 더욱 뚜렷하고 투명하여 제 속까지 낱낱이 드러내는 환한 비밀의 대낮

금세 달라붙은 어두운 그림자조차 녹여낼 듯 뜨겁게 입술과 입술을 맞댄 채 마치 마지막인양 키스를 나누는 그 누군가 여기 결코 죽어서가 아닌, 살아서 기어이 갈참나무 숲을 이루고, 드디어 보리밭 위로 종달새 울음이 떠오를 때

끝끝내 안식을 모르는 생멸과 재생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소란하고 분주한 땅의 그 어느 이슬 한 방울인들 우연히 맺혀있을 것인지요

어찌 축 늘어진 8월 태양 아래의 호박잎, 오솔길에 달라붙은 도깨비바늘, 추수 끝난 들판의 빈 수수대궁들마다 속임 없이 주어진 놀라운 시간의 신비를 즐거이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런지요

* 검색 - 오성일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

 

* 물방울 - 오두섭 
시작은 모른 채
여기까지 달려온 길
소매 끝 꽉 붙잡았다
숨죽이며 벼랑 떠받는 바람
시간이 잠시 숨쉬기를 멈춘다
더 이상 터질 곳 없는
꽃의 절정인 듯
절체절명인 듯
빌 공!
사이 간!
목까지 올라온 숨
놓치지 않고 머금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만들고 있는 듯이
깜짝 순!
틈 간! *

 

* 번역의 유토피아 - 김재혁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


* 그러니 애인아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 김선우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물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
* 김선우시집[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 지성사

* 래여애반다라 3 - 이성복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 이성복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 지성사

* 해남 가는 길 - 박병두
해남은 해외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푸르던 내 마음 붉은 꽃으로 피어난다
아니면 바다의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소금꽃 끝없이 피어나는 가슴
낙타등 같은 하루를 두드리며
해남 가는 길
발바닥에 물집 잡히듯 잡히는 그리움
해남 가는 길
가면 갈수록 끝없이 목마른 그 길
* 박병두시집[해남 가는 길]-고요아침

 

* 눈밭에 서있는 나무 - 김후란

밤새 눈이 내린 그 이튿날
눈밭에 발을 담근 겨울나무들
여럿이서 혼자서
세상을 응시하는 철학자 되어
장엄한 침묵 속에 서있다
모차르트의 ‘구도자의 저녁기도’가
흐르고
추운 겨울나무에겐
길게 흘러내린 그림자뿐
말없이 내게 기댄 그림자처럼

 

* 참을 수 없는 슬픔 - 박남준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아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다는 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 *

 

* 보름 - 장승리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

 

* 민들레꽃 필 무렵 - 김소영 

그 남자한테서

가을햇빛에 펄럭이는 삶은 기저귀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에 코를 박고 오랜 시간 나는 행복했습니다. *


* 좋은 날 - 천양희

작은 꽃이 언제 다른 꽃이 크다고 다투어 피겠습니까
새들이 언제 허공에 길 있다고 발자국 남기겠습니까
바람이 언제 정처 없다고 머물겠습니까
강물이 언제 바쁘다고 거슬러 오르겠습니까
벼들이 언제 익었다고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해 지는 줄 모르고 팽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아이들 어깨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진장 좋은 날입니다 *
* 천양희시집[너무 많은 입]-창작과 비평사

* 팔정사 백일홍 - 최정례

꿈속의 또 꿈속만 같은
눈썹에 불이 붙은 그를 만난 날
그 눈길 받아내지 못하고
흔들리다 잠 깬 날
찬 강물로 달려가
풍덩 몸 던지고 싶던 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징징징
징소리가 들렸다
절에 오르는 이가 있었다
절에 올라 무조건 빌어보려는 이가 있었다
벡일홍 꽃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정사 단청 끝이 타고 있었다
꽃밭으로 가 치마폭을 흔들며
늦가을까지 환할까 어쩔가를 묻는 이가 있었다
* 최정례시집[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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