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 손택수

효림♡ 2014. 6. 28. 16:06

*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치 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


* 새  

점 하나를 공중에 찍어놓았다 점자라도 박듯 꾸욱

눌러 놓았다

 

날갯짓도 없이,

한동안,

꿈쩍도 않는,

 

비가 몰려오는가 머언 북쪽 하늘에서 진눈깨비

소식이라도 있는가

 

깃털을 흔들고 가는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는

골똘한 저,

한 점 

 

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 지리산과 나의 불편한 관계 
지리산에 전화를 건다
아마도 진달래 수달래
꽃물결 짜하게 번져 있던
칠선계곡 어디쯤,
아님 물안개를 속곳처럼 아슬하게 걸쳐서
보얀 살결이 드러날까 말까
넋을 잃기 좋았던 선녀탕 부근?

지리산에서 잃어버린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본다 나는
누군가와 늘 통화 중이었지만
언제나 불통이었지
불통의 대가로 비싼 통화료만 냈어
그런데 그때 그 산속에서까지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소중한 누가
과연 내게 있기는 있었단 말인가

무인도는 가지 못하고
통화권이라도 이탈할 수 있는 자신을
한숨처럼 탁 놓여날 수 있는 자신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단 말인가
지나가던 산토끼나 호기심 많은 곰이
사용법을 몰라 애를 먹고 있을지도 모를,
성질 급한 멧돼지의 배 속에 들어가서
가끔씩 들어오는 문자 메시지 소리로
꾸르륵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휴대폰에 음성 메시지까지 남겨본다
아마도 산은 휴대폰 하나 때문에
통화권을 이탈해버린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탈한 적도, 통화를 거부한 적도 없이
우연하게 떠맡은 애물단지의 처리를 놓고
지끈지끈 골치가 아플 것이다

내가 통화권을 이탈한 뒤에 지리산을 만났다면,
지리산은 나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통화권을 이탈했다 할까, 그럴까
산은 받지 않는다 심기가 불편한지
내내 묵묵부답이다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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