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면 - 김용택
바람 부는 나무 아래 서서
오래오래 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오나요? *
* 별일
양말도 벗었나요.
고운 흙을 양손에 쥐었네요.
등은 따순가요.
햇살 좀 보세요.
거참, 별일도 다 있죠.
세상에, 산수유 꽃가지가
길에까지 내려왔습니다.
노란 저 꽃 나 줄 건가요.
그래요.
다
줄게요.
다요, 다. *
* 바람
바람도 없는데
창문 앞
나뭇잎이 흔들리네요.
나를 안아주세요. *
* 연애
언제나
내 마음 난간에
아슬아슬
서 있는 사람
그렇게
절벽 난간에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
부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아!
아찔한
사람 *
* 한낮의 꿈
깜박 속았지
한낮에 붉은 입술
땅이 푹 꺼졌어
눈 떠보니
가만히 닿던
그 서늘함
흔적 없었지
거짓말이었어
꿈이었지
한낮의 꿈
붉은 너의 입술
산을 열고
돌을 쪼개고
흙담을 허물고 나와
너는
내 마음속
가장 어둔 곳을
살짝 치켜세운
속눈썹 같은
한 송이 꽃이었다네 *
* 나
그대를 생각하며 봄비 오는 5월 산 바라보면
오! 숨이 턱까지 꽉 차 오릅니다.
숨넘어가기 전에 나 다 가지세요. *
* 큰일
날 저물면 산그늘 내려오듯
제 가슴에 서늘한 산 그림자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 그림자 나를 덮어오니
큰일입니다.
당신을 향해 차차 데워지는 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큰일입니다.
뜨거워서
날이 갈수록 뜨거워져서
내 몸이 델 것 같은데,
인자 나는
참말로
큰일 났습니다. *
* 현기증
몽롱해집니다.
피곤하고 졸리운데
당신이 내 가슴에 한없이 파고드시니
대체, 여기는 어디랍니까. *
* 그랬어요
불 꺼진 방에 달빛은 가득했고
소쩍새는 밤 새워 울고
강물은 내 시린 가슴에 길을 내며 흐르고
내 여자는 없고, *
* 빈 들
빈 들에서
무를 뽑는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
* 흰 손
해 지는 서산으로 간다
아름다워라
산그늘 속 흰 억새꽃에 나는
눈 못 뜨겠네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해는 지고
산그늘 속 억새꽃
하얀 손짓에
어지러워라 눈 못 뜨겠네
내가 희게 부서지겠네 *
* 당신의 꽃
내 안에 이렇게 눈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
* 꽃 한 송이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
* 새
이 겨울
너를 보낸다
시퍼런 하늘
매운 바람 속을 날아간다
빨갛게 언
너의 맨발에
얼음이 박혀 있다. *
* 김용택사랑시선집[사랑이 다예요]-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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