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순간들 - 임동확

효림♡ 2016. 4. 12. 09:00

* 순간들 - 임동확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지만 어쩐지 그 자리가 비어있는 듯해서 곰곰

생각하면 자폐아 아들을 빚처럼 남긴 채 홀연 떠난 바보새 출판사 김규철 사장처럼

사실은 아주 가난해서 문득 눈물짓게 하는 것들.

 

  그래, 가만 화장실에 다녀오다 담배 한 대 피우며 무심히 올려다밤하늘의 별들처럼

아주 순박해서 걷잡을 수 없이 그리워지는 것들.

 

  내세울 거라곤 남루와 무명뿐이어서 어떤 기록이나 분류에도 자꾸만 엇나가는

역사의 푼수들처럼 끝내 어중간해서 더욱 안타깝거나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한낱 스쳐가는 필선筆線에서도 태양보다 무려 100배 이상 빛난다는

초신성 같은 추억을 숨겨왔을 화가 여운의 목탄화처럼

실상 매우 투박하고 거칠어서 더더욱 간절하고 서러운 것들.

 

  그래서 강보襁褓에 싸인 아이처럼 끝없는 보호와 구원의 손길이

필요했을 예외의 가치들.

 

  그러나 마지막 판돈까지 잃은 도박꾼을 따라 걷던 밤길의 그믐달처럼

그저 덧없어서 자꾸 헛웃음 짓게 하는 것들.

 

  아무렴, 잊어도 좋으련만 오로지 부재로서만 둔감해진 가슴을 피할 새 없이

빗방울처럼 파고드는 사랑의 순간들. *

 

* 가족도(家族圖) 

너무나도 가깝고도 멀어서
아침마다 고기반찬을 나눠 먹고도
여태 서로의 꿈을 모른다
너무나도 멀고도 가까워서
각자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벌써 궁금해진 안부를 묻고 있다
더는 가까워질 수도,
혹은 멀어질 수도 없어서
더러 꼭 껴안거나 다리 하나 걸친 채
밤새 저마다의 병명으로 끙끙 앓으며 *

 

* 한 줌의 도덕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중간 휴게소였던가
사막을 길게 가로지르는 도로 한 켠의 수로를 파기 위해,
단 한 명의 인부가 허리 굽힌 채 연신 곡괭이질 해대고,
단 한 명의 감독관이 그걸 바짝 감시하는 풍경과 마주친
어느 여성시인이 버스에 올라타려다 그만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

-한 줌의 도덕-아도르노 책명

 

*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지평선처럼 단지 접근 불가능한 절대 고독의
근원 혹은 알 수 없는 전망의 바탕을 암탉처럼 품고 있는 길.

험하거나 평탄한 길들이 안겨주는 가장 값진 선물은, 놀랍게도

예정된 결말이나 확신에 찬 기대를 가차 없이 저버리는 뜻밖의 경험이다.

해피엔드로 끝나기 마련인 싸구려 영화와 달리, 어떤 길이든 늘

아직 때가 이르지 않는 출발 혹은 이미 지나쳐버린 종말을 들키고 싶은 비밀처럼 감추고 있다.

 

뒤늦게야 조수 겸 아내인 착한 젤소미나를 잃고 만취한 채 바닷가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차력사 짐파노의 속죄이든,* 감옥에 간 자신을 기다리다 못해 배고파 외간남자에 몸을 판 아내의 불륜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고향 가는 눈길 속에서 죽어가게 한 남편 세이트알리의 절규이든,**

 

결코 원하지 않았을 그 사태들조차 들판 지나 산맥을 넘어가는

전선들처럼 또 다른 비밀의 정점으로 길게 뻗어 있다.

지금 내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한계 또는 방랑이 또 다른 출발의
경계라는 듯 내륙의 길이 끝나는 곳에 물길이, 물길이 다하는 곳에

하늘의 길이 다시 한 번 미지의 지상과 길게 입맞춤하고 있다.

한사코 길을 그리워할 따름인 길들이 길과 만나지 못하면 결코

길이 아니라는 듯 힘든 처방의 이정표처럼 서성거리고 있다. *

* 이탈리아 영화[길]의 주인공들

** 터키 영화[욜(yol)의 남자 주인공

 

* 꽃과 가시

함부로 피어난 은 어디에도 없으리니

급기야 뒤얽힌 가시 속에 애써 피운

탱자나무 흰 을 탓하지 말아다오

줄기마다 작은 가시를 주렁주렁 단

넝쿨장미를 무심코 꺾지 말아다오

행인들이여, 목숨 같은 사랑일수록

쓰라린 탄식의 밤을 기억하기 위하여

제 그늘 속에 어느덧 역사처럼 서러운

가시를 식도처럼 숨겨둘 수밖에 없으리니

저마다의 적의와 비애가 깊을수록

독약 같은 향기를 마구 뿜어내며

제 가슴마다 역사처럼 당당한 가시를

어린 초병처럼 세워둘 수밖에 없으리니 * 

 

* 임동확시집[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