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봄날은 간다, 가 - 문인수

효림♡ 2016. 4. 18. 09:00

* 감나무 - 문인수

올해도 고향집 감을 땄다.

복잡하게 우거진 가지들 중에 매년

내가 골라 딛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진토가 되었을 아버지의 등뼈,

허리 휜 그 몸 냄새를 군데군데 묻혀둔 바이지만

타관 길엔 도통 어두운 이 말씀.

감나무를 오르내리는 내 구부정한 그림자도 어느덧

늙은 거미같이 더디다.

감나무를 내려와 땅을 디디니, 작년보다도 더 큰 안심이

덥석 날 받아 안는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감나무를 한참 올려다본다. 속절없이 고목인

한 시절의 유적이 쓸쓸히

서쪽에 선다.

빈 감나무의 검은 골조가

저녁노을 깊이 음각으로 찍히면서

내 등덜미를 붉게 떠민다. *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

 

* 봄날은 간다, 가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 뒤쪽에 사촌동생 내외가 들어와 사는 전원주택이 있다. 이 집에, 남녀 종반 간 아홉명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모였다. 누님 셋, 그리고 사촌형 내외, 우리 내외, 다들 60대 중후반이거나 70대 중후반이다. 세 누님은 공교롭게도 아까운 나이에 각기 부부 사별을 겪었다. 그래, 요즘 어디든 함께 잘 어울려 다닌다.

  그런데, 이곳 평창에 온 첫날부터 내리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에 갇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가지 못하니, 일흔아홉 저 누님 이제 슬슬, 간다. 물론, 젊은(?) 두 누님도 간다. 금세, 이구동성으로 아직 참 잘도 넘어가는 자매들, 예의 흘러간 유형가<봄날은 간다>를 부른다. 말하자면 누님들의 주제가다. 지난봄 포항 모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 형제들도 모두 따라 부른다. 3절까지, 끝까지 다 부르고, 처음부터 다시 부른다. 또 부르고, 또 부른다. 이미 간 봄, 간다 간다 불러일으키니 정말, 철 지나도 실은 봄날은 간다, 가. 가도 가도 비.

  내가 불쑥 말했다. 봄날은 간다 3절 다음, 노인들을 위한 봄날을, 그 '4절'을 쓰겟다고...... 썼다. 성원에 힘입어, 썼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가. 그리하여 이제 4절까지, 저 끝까지 가느라 여기 눌러앉은 뒷모습들. 그러나 봄날은 결코 제 몸 앉혀둔 채 마저 간 적 없어, 느린 곡조로 저마다 또 봄날은 간다, 가. 가느라, 지금 등이 더 굽는 중...... * 

 

* 문인수시집[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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