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격렬비열도 - 박후기

효림♡ 2016. 4. 20. 09:00

* 격렬비열도 - 박후기 

격렬과

비열 사이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 *

 

* 흠집 

이가 깨져 대문 밖에 버려진 종지에

키 작은 풀 한 포기 들어앉았습니다

들일 게 바람뿐인 독신,

차고도 넉넉하게 흔들립니다

때론,

흠집도 집이 될 때가 있습니다 *

 

* 물집 

선운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 관절을 어루만지다

멍든 당신 복숭아뼈를 생각했습니다

 

날 저문 산길

부어오른 복숭아뼈를 만지던

내 마음도 그만

쓸리고 접질렸던 것인데요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물집 같은 당신 얼굴

슬며시 제 등에 업히더군요. *

 

* 병산 행간

  그대 나이 드는 일 못내 서럽고, 오늘 살림 형편 억울하다 느껴진다면,

어느 바람 좋은날  하루 홀랑 빚을 내 병산서원엘 다녀오시라.

 

  여직 비포장길 툴툴거리며 지났거든, 알게 모르게 나이를 먹은 것처럼,

배롱나무 꽃 수작질 슬몃슬몃 받아넘기며, 어느새인지 저도 모르게 만대루에 오르시라.

 

  두서없는 분투의 시절 뜬금없이 지났다는 생각마저 들거들랑,

강 건너 일곱 폭 청산 병풍만 접었다 폈다 만지작거리질 말고,

가만 누마루 계단 밟고 내려와 스물네 개 늙은 기둥을 만나보시라.

 

  발없는 강물이 저녁 산 그림자 길게 끌고 흘러가느니,

하나 같이 주름져 갈라지고 이지러졌으나 석양 만(萬) 근 떠받치며

묵묵히 세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둥과 기둥 사이,

침묵의 행간(行間)을 읽어보시라. *

 

* 박후기시집[격렬비열도]-실천문학사,2015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가네 - 나호열   (0) 2016.04.22
그래서 즐거웠는지 - 정현종  (0) 2016.04.20
봄날은 간다, 가 - 문인수   (0) 2016.04.18
심심풀이로 아픈 거지 - 강경주   (0) 2016.04.18
순간들 - 임동확  (0) 201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