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렬비열도 - 박후기
격렬과
비열 사이
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 *
* 흠집
이가 깨져 대문 밖에 버려진 종지에
키 작은 풀 한 포기 들어앉았습니다
들일 게 바람뿐인 독신,
차고도 넉넉하게 흔들립니다
때론,
흠집도 집이 될 때가 있습니다 *
* 물집
선운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 관절을 어루만지다
멍든 당신 복숭아뼈를 생각했습니다
날 저문 산길
부어오른 복숭아뼈를 만지던
내 마음도 그만
쓸리고 접질렸던 것인데요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물집 같은 당신 얼굴
슬며시 제 등에 업히더군요. *
* 병산 행간
그대 나이 드는 일 못내 서럽고, 오늘 살림 형편 억울하다 느껴진다면,
어느 바람 좋은날 하루 홀랑 빚을 내 병산서원엘 다녀오시라.
여직 비포장길 툴툴거리며 지났거든, 알게 모르게 나이를 먹은 것처럼,
배롱나무 꽃 수작질 슬몃슬몃 받아넘기며, 어느새인지 저도 모르게 만대루에 오르시라.
두서없는 분투의 시절 뜬금없이 지났다는 생각마저 들거들랑,
강 건너 일곱 폭 청산 병풍만 접었다 폈다 만지작거리질 말고,
가만 누마루 계단 밟고 내려와 스물네 개 늙은 기둥을 만나보시라.
발없는 강물이 저녁 산 그림자 길게 끌고 흘러가느니,
하나 같이 주름져 갈라지고 이지러졌으나 석양 만(萬) 근 떠받치며
묵묵히 세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둥과 기둥 사이,
침묵의 행간(行間)을 읽어보시라. *
* 박후기시집[격렬비열도]-실천문학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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