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지나가네 - 나호열

효림♡ 2016. 4. 22. 09:00

지나가네 - 나호열
서녘 하늘에 걸린 노을을 읽는다

 

붉어졌으나 뜨거워지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닿을 수 없는 손길로 걸어 놓아도

그 깃발을 신기루로 이미 알아 버린 탓일까 

아직 노을이 꺼지기에는 몇 번의 들숨이 남아 있어

긴 밤을 건너갈 불씨로

빙하기로 접어든 혈맥을 덥힐 뜨거운 피로

은은하게 가슴 속 오솔길에 퍼져 오르는 와인 한 잔으로

오독하는 동안

늙어 더 이상 늙지 않는 심장은

빠른 보폭으로 세월을 앞서 가지만

 

그래도 아직 가야 할 서녘을 바라보는 눈 속에는

겨울에 피는 꽃

향낭 가득 씨로 남아있는

배우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 *

 

*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ㅡ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가장이란

떠돌이 말과 뒷면에 끈끈이풀을 감춘 아름다움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청중들

 

한 사람은 향기가 고운 백합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붉음에 취해 장미라고 했고

끝자리 한 분은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다

 

ㅡ 백합과 장미와 사람 사이에서 그때그때 다르다는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정답은 이러하였다

 

ㅡ 향기가 붉은 그때그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길! *

 

* 바람의 전언 

저기, 별똥별

그리우면 지상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밤을 기다려

하루 이틀 마다 않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은 맑고 그윽한 일

오지 않는 전언 대신 겨울이 왔고 바람이 불었다

 

푸른 이끼가 돋은 약간의 우울에는 쌉싸름한 냉소가 섞여

주저하며 닫지 않은 문 안으로 그림자를 들여놓았다

얼굴 보이지 않으니 가슴이 따가워지고

목소리 들리지 않으니 귀가 커지는 바람의 그림자

홑이불 야윈 몸에 두르니 기척이 들릴 듯도 하였다

 

별똥별은 화약을 품고 있었다고 바람이 전해 주었다

이런, 이미 당신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봄이면 지천으로 당신을 받아들여 온몸으로 터져 버린 꽃들을

누군가는 보게 될 것이다 *

 

* 나호열시집[촉도]-시학,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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