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 김명인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았네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꽉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
* 여우비
엉엉 울 일 아니라는 듯 입술 걸어 잠그고
고개까지 젖히며 애써 소나길 가두지만
빗방울 매달지 않아도 이내 깔리는 눈자위엔
속울음 그렁그렁 번져 간다
푸른 뒤축 재게 밟으며 구름 그늘로 햇살 덮으며
거뒀다 폈다 산등성일 쓸고 가는 저 안절부절
마침내 속엣것 다 쏟아 내는 노을로 주저앉았구나!
오늘은 두 마음이 함께 놀았으니
이 비 잠깐 스쳐 간 것이지, 어느새
활짝 트인 하늘 한 폭 서산마루에 올려놓는다 *
* 장편(掌篇)
후박나무 키 낮춘 손들이
가을 한때를 흔들어 보내고 있다
나는 모든 이별이
천편일률 장편(長篇)인 줄 알았다
바람이 잎맥을 들쑤시자
사연이 휘는지
손등을 뒤집는 저 자리
자디잔 그늘을 토닥거리는
각양각색 짧은 이별들! *
* 봄비
모종을 옮기던 꽃삽들이
텃밭 모서리에 꽂혀 비 맞고 있다
새벽녘, 산판으로 올라간 사내들은 이 우중
어디쯤에서 간이 대피소 차려 놓고 비 가릴까?
푸릇한 산자락이 하루 종일 펄럭거리며
봄비를 불러 모으는 시절
산 아래 여자들은 제 몸의 묘상에 새싹 틔우려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싣고 돌아올 사내들
기다린다, 빗소리에 물오른 낮잠
지레 젖는 줄 모르고! *
* 하루살이
하루살이 떼가 숲길을 따라오며 얼굴 둘레로 난다
눅진한 땀 냄새에 이끌린 것이지
(하루를 살아도 코는 필요한 것)
손사래에 수없이 스쳤건만
매도 벌도 상관없다 비명조차
가로막힌 비문 한 떼로 눈앞이 어지럽다
하루가 한생인
콧등 위 하루살이는
사자의 포효조차 무섭지 않다 *
* 여를 감싸다
만경 신포에 밀물 들어
물 첨벙 수다에 작은 여 큰 여 잠방거리다
한 둘씩 물 보자기에 감싸이는 것 보네
어떤 해는 반나마 갈앉은 수평 너머로
날 저문데 무슨 자맥질인지
꾸룩 꾸구룩 숨차서 빼무는 붉은 혓바닥
단 숨을 핥아 구름도 꽃놀일까?
파랑 다 털린 바다가 뭍으로 기어 온다
외딴 절집 망해사 마당까지! *
* 김명인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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