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 김명인

효림♡ 2016. 4. 26. 09:00

* 기차꽃그늘주저앉아 - 김명인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았네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꽉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

 

* 여우비

엉엉 울 일 아니라는 듯 입술 걸어 잠그고

고개까지 젖히며 애써 소나길 가두지만

빗방울 매달지 않아도 이내 깔리는 눈자위엔

속울음 그렁그렁 번져 간다

푸른 뒤축 재게 밟으며 구름 그늘로 햇살 덮으며

거뒀다 폈다 산등성일 쓸고 가는 저 안절부절

마침내 속엣것 다 쏟아 내는 노을로 주저앉았구나!

오늘은 두 마음이 함께 놀았으니

이 비 잠깐 스쳐 간 것이지, 어느새

활짝 트인 하늘 한 폭 서산마루에 올려놓는다 *

 

* 장편(掌篇)

후박나무 키 낮춘 손들이

가을 한때를 흔들어 보내고 있다

나는 모든 이별이

천편일률 장편(長篇)인 줄 알았다

바람이 잎맥을 들쑤시자

사연이 휘는지

손등을 뒤집는 저 자리

자디잔 그늘을 토닥거리는

각양각색 짧은 이별들! *

 

* 봄비

모종을 옮기던 꽃삽들이

텃밭 모서리에 꽂혀 비 맞고 있다

새벽녘, 산판으로 올라간 사내들은 이 우중

어디쯤에서 간이 대피소 차려 놓고 비 가릴까?

푸릇한 산자락이 하루 종일 펄럭거리며

봄비를 불러 모으는 시절

산 아래 여자들은 제 몸의 묘상에 새싹 틔우려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싣고 돌아올 사내들

기다린다, 빗소리에 물오른 낮잠

지레 젖는 줄 모르고! *

* 하루살이

하루살이 떼가 숲길을 따라오며 얼굴 둘레로 난다

눅진한 땀 냄새에 이끌린 것이지

 

(하루를 살아도 코는 필요한 것)

 

손사래에 수없이 스쳤건만

매도 벌도 상관없다 비명조차

가로막힌 비문 한 떼로 눈앞이 어지럽다

 

하루가 한생인

콧등 위 하루살이는

사자의 포효조차 무섭지 않다 *

 

* 여를 감싸다

만경 신포에 밀물 들어

물 첨벙 수다에 작은 여 큰 여 잠방거리다

한 둘씩 물 보자기에 감싸이는 것 보네

 

어떤 해는 반나마 갈앉은 수평 너머로

날 저문데 무슨 자맥질인지

꾸룩 꾸구룩 숨차서 빼무는 붉은 혓바닥

단 숨을 핥아 구름도 꽃놀일까?

 

파랑 다 털린 바다가 뭍으로 기어 온다

외딴 절집 망해사 마당까지! *

 

* 김명인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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