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젖는 것들 때문에 *
* 생(生)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
* 까치설날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루 더 있다 갈게요. 아니 사나흘 더 자고 갈게요. 거짓부렁하게 해주십시오. 뭔 일 있냐? 고향에 그만 오려고 그러냐? 한숨 내쉴 때, 파리채며 쥐덫을 또 수세미로 닦을까봐 그래요. 너스레 떨게 해주십시오. 용돈 드린 거 다 파먹고 가야지요. 수도꼭지처럼 콧소리도 내고, 새끼 강아지처럼 칭얼대게 해주십시오. 곧 이사해서 모실게요. 낯짝 두꺼운 거짓 약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무만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듯, 내 니무그늘을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대대로 건네받으셨다는 금반지는 다음 추석에, 그다음, 그다음, 몇십년 뒤 설날에 받겠습니다. 당신의 고집 센 나무로 살겠습니다. 나뭇잎 한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
* 시인
몽당연필처럼
발로 쓰고 머리로는 지운다.
면도칼쯤이야 피하지 않는다.
몽당(夢堂)의 생,
자투리에 끼운 볼펜대를 관(冠)이라 여긴다.
뼈로 세운 사리탑!
끝까지 흑심(黑心)을 품고 산다.
한 사람의 손아귀
그 작은 어둠을 적실 때까지.
검게 탄 마음의 뼈가 말문을 열 때까지. *
* 이정록시집[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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