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서 - 정끝별
모래내 천변 오동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 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
* 정끝별시집[와락]-창비
* 처서(處暑) -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십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 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채 별처럼 시끄럽다 *
* 처서 - 장석남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2010
* 처서(處暑) 지나고 - 김춘수
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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