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겨울 여행자 - 황학주

효림♡ 2017. 12. 1. 09:00

* 겨울 여행자 - 황학주

어느날 야윈 눈송이 날리고

그 눈송이에 밀리며 오래 걷다

 

눈송이마다 노란 무 싹처럼 돋은 외로움으로

주근깨 많은 별들이 생겨나

안으로 별빛 오므린 젖꼭지를 가만히 물고 있다

 

어둠이 그린 환한 그림 위를 걸으며 돌아보면

눈이 내려 만삭이 되는 발자국들이 따라온다

 

두고 온 것이 없는 그곳을 향해 마냥 걸으며

나는 비로소 나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은 그렇게 걸어 사랑에서 깨어나고

눈송이에 섞여서 날아온 빛 꺼지다, 켜지다 *

 

* 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사람에게 있었다  

숨도 쉴 수 없는

행복하게 외로웠던 순간들을 안녕,

이라고 괄호 쳐두면

운명이 생각하는 시간에 대해 낙인에 대해

급기야는 우리에게 보석이 되어버리는 불취(不取)에 대해

한번은 물어줘야지 싶다

오래 말린 곶감 속에 감씨 하나로 앉아 네가 울고 있을 것 같았고

가시나무에 여윈 등을 치대고 있는

내 기다란 그림자ㅡ 등뼈에 대팻밥처럼 보풀이 인 채 휘청이는 것도 같았다

사막보다 더 캄캄한 바깥을 보았으면 해서

우리가 커튼 안으로 숨어든 것을 일테면 예정설로 묶을 수 있나

누구의 것이 된다는 마음의 시큰시큰한 통각만 아니었다면

마른나무 열매처럼 또르르 그저 굴러간 것인데,

커튼 뒤에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순간

누군가 부를 수 있다 한사람은 밖으로 나가야 하는

 

황량한 사막 커튼이 동시에 열리는 자정의 문밖이 있다면

문틈으로 영혼 상한 그림자를 끌며 나가

나는 책장을 펴고 낭독을 시작하리라

알아주렴 당신과 나 사이에 구원이 있었다 *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

 

* 만년(晩年)

조용한 동네 목욕탕 같은

하늘 귀퉁이로

목발에 몸을 기댄 저녁이 온다

 

만년은 갸륵한 곳

눈꺼풀 처진 등빛, 깨져간다

눈꺼풀이 맞닿을 때만 보이는 분별도 있다

 

저녁 가장자리에서

사랑의 중력 속으로 한번 더 시인이여,

외침조차 조용하여 기쁘다

 

하늘 귀퉁이 맥을 짚으며

물 흐르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참는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다 *

 

* 낙과의 꼭지 
흐린 날 개어귀에 햇살 비칠 때
박차를 가하던 필생이 툭, 떨어진다
단 한줄의 소리도 없다

결심을 해체한 순간의 육체
바닥까지 숙이고 남은 듯한
모과꼭지

바로 직전까지 쌓던 그 많은 열심은
마치 모과가 아니었다는 듯
꼭지는 마르고

흐린 날 개어귀에 평심의 햇살
그 무선(無線) 한줄은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

태양풍 속으로 날아간 낙과의 중심

 

* 황학주시집[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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