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12월 - 김이듬

효림♡ 2017. 12. 1. 09:00

* 사과 없어요 - 김이듬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 달라고 할까,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

* 독수리 시간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 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그녀의 방까지
나는 바짝 마른 독수리 등에 업혀 갔다 *

 

* 시골 창녀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엄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 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 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유등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 12월 

저녁이라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決心)과 망신(亡身)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 떼가 죽을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었니?

* 김이듬시집[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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