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류시화 시 모음집 - 시로 납치하다

효림♡ 2018. 8. 22. 09:00

* 두 사람 - 라이너 쿤체(독일)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

 

*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 잘랄루딘 루미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그 작은 심장 안에
이토록 큰 슬픔을 넣을 수 있습니까?’

신이 대답했다.
‘보라, 너의 눈은 더 작은데도
세상을 볼 수 있지 않느냐.’ *

 

* 숨지 말 것 - 에리히 프리트

시대의

일들 앞에서

사랑 속으로

숨지 말 것

 

또한

사랑 앞에서

시대의 일들 속으로

숨지 말 것 *

 

* 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미국)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 더 푸른 풀 - 에린 핸슨(호주)
건너편 풀이 더 푸른 이유가
그곳에 늘 비가 오기 때문이라면,

언제나 나눠 주는 사람이
사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고

당신이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
사실은 두려움으로 마비된 사람이라면,

세상은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함께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자신은 진정한 안식처가 없으면서도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어쩌면 그들의 풀이 더 푸르러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 색으로 칠했기 때문이라면.

다만 기억하라, 건너편에서는
당신의 풀이 더 푸르러 보인다는 것을. *

 

* 원 - 에드윈 마크햄(미국)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

 

* 사막 - 오르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 절반의 생 - 칼릴 지브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과 벗하지 말라.

절반의 재능만 담긴 작품에 탐닉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죽음을 죽지 말라.

절반의 해답을 선택하지 말고

절반의 진리에 머물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말해야만 할 때 침묵하지 말고

침묵해야만 할 때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라.

가장하지 말라.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절반의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

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절반의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든다.

절반의 삶은 도착했으나 결코 도착하지 못한 것이고

일했지만 결코 일하지 않은 것이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결코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의 동반자가 아니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

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절반의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온전한 사람이므로. *

 

* 방문 - H.M. 엔첸스베르거

종이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방에 천사가 서 있었다.

낮은 계급으로 보이는

약간은 흔한 천사.

넌 상상도 할 수 없어, 그 천사가 말했다.

네가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

네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파랑색이 가진 만 오천 가지 색조 중

단 하나만큼도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줄 수 없어.

거대한 마젤란 성운의 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흔한 질경이 풀조차

눈에 띄지 않지만 흔적을 남기지.

나는 그의 빛나는 눈을 보고 그가 논쟁을,

긴 싸움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 기다렸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

 

* 넓어지는 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 어떤 사람 - 레이첼 리먼 필드

상한 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몹시 피곤해진다는 것.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속 생각이 모두 움츠러들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는 것.

그러나 더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생각이 갑자기 환해져서
반딧불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 *

 

* 비 - 레이먼드 카버

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하루 종일 이대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시 그 충동과 싸웠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항복했다. 비 내리는 아침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로.

나는이 삶을 또다시 살게 될까?
용서할 수 없는 똑같은 실수들을 반복하게 될까?
그렇다. 확률은 반반이다. 그렇다. *

 

* 그 겨울의 일요일들 - 로버트 헤이든(미국)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쑤시고
갈라진 손으로 불을 피웠다.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잠이 깬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면 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집에 잠복한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일어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냉담한 말을 던지곤 했다.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


 

* 류시화 시 모음집[시로 납치하다-인생학교에서 시 읽기1]-더숲,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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