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 이설야

효림♡ 2018. 11. 8. 08:30

* 겨울의 감정 - 이설야  

당신이 오기로 한 골목마다
폭설로 길이 가로막혔다
딱 한번 당신에게
반짝이는 눈의 영혼을 주고 싶었다
가슴 찔리는 얼음의 영혼도 함께 주고 싶었다
그 얼음의 뾰족한 끝으로 내가 먼저 찔리고 싶었다

 

눈물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웃음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겨울이라는 감정
당신이라는 기묘한 감정

 

눈이 내린다
당신의 눈 속으로
눈이 내리다 사라진다

 

당신 속으로 들어간 눈
그 눈을 사랑했다
한때 열렬히
사랑하다 부서져 흰 가루가 될 때까지
당신 속의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첫눈이 내리고
눈처럼 사라진
당신의 심장

 

내 속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 

 

* 문 닫은 상점의 우울

나는 집 나간 고양이

문 닫은 상점의 우울을 즐기는

나는 뚱뚱한 개 새끼

아무거나 처먹고 검게 탄 인형을 토하는

 

내가 낳은 그림자를 뭉개며 막차를 쫓는

나는 깜깜한 아버지의 온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 골라 하지

 

나는 네 발로 뒤로 걷는 수수께끼

두 발로 거짓말을 즐기는

맑은 날은 깨금발로 금을 밟아

두꺼운 질서를 비웃곤 하지

 

나는 아무것도 포개고 싶지 않은 낮달

오래된 시계가 버린 그늘

잠자리 눈으로 뒤통수만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꾸만 죽이는 *

 

* 조등(弔燈)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꽃은 시들고

나비는 죽었다

 

내가 인생의 꽃등 하나 달려고

바삐 길을 가는 동안

사람들은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사랑한 순서대로

지는 꽃잎

나는 조등을 달까부다 *

 

* 식물들의 사생활

-모두가 꽃을 보기 위해 허공을 버틴다

 

호박꽃

저 여자

달동네 담벼락에 기대어

저토록 뜨겁게 웃는 걸 보니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보다

사랑받지 못해도

여자는 배가 불러

둥근 아이들을 낳는다

난 꽃이 아니야

넓은 잎사귀로 얼굴을 가린

호박꽃
 

양귀비꽃

옥상에 숨어 피고 있었다

노을이 붉어지자

선홍빛 꽃잎을 크게 벌리고

노란 꽃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어미 개와 새끼를

양귀비꽃 앞에서 흘레붙였다

개줄이 심하게 흔들리다 조용해지자

축 늘어진 어린 수캐

그 옆에서 어미 개가 울고 있었다
 

얼음꽃

숭의동 집장촌 13호

선홍빛 유리문 안에

검은 속눈썹 붙인 얼음꽃들

핏기 가시지 않은

고통 몇십근

꽃방석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살얼음 낀 문이 열리자

흔들리는 저울 위에서

녹고 있는 꽃들

 

자목련

매 맞은 여자의 자줏빛 얼굴이

땅바닥에서 밟히고 있다

물거울처럼 너는 헛것! 헛것이었다고,

잠든 물고기처럼

모두가 눈을 뜨고

이 헛것인 세계를 겨우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렇게 살아간다

바람이 여자의 얼굴에 금을 긋고 지나간다

 

종이꽃

신발에 꽃이 피었다

스물두켤레의 작업화에 꽃을 피워놓고

진혼굿을 한다

찢어지고 밑창이 다 떨어져나간

먼저 간 신발들에게

아직 살아 있는 신발들이 *

 

* 이설야시집[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2016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 시 모음   (0) 2018.12.17
눈(雪) 시 모음 2  (0) 2018.12.01
가을 시 모음 6  (0) 2018.10.31
류시화 시 모음집 - 시로 납치하다  (0) 2018.08.22
파도 시 모음   (0) 2018.08.01